오피니언 시론

레고랜드발 ‘돈맥경화’ 사태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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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강원도의 레고랜드발 채무 불이행 사태가 촉발한 회사채와 단기자금시장의 신용 경색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지난 23일 발표했다. 휴일에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는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총출동했다.

영어 단어 ‘크레딧(credit)’에는 신뢰·신용이란 뜻이 있다. 금융에서 신용 시장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대출과 채권이 모두 신용에 포함돼 개인·기업·정부 모두 자금을 조달하는 일차적인 수단이 신용이다. 신용 시장은 원리금을 돌려받을 것이란 믿음으로 굴러간다. 신뢰가 흔들리면서 지금 국내외 신용 시장이 불안하다.

회사채·단기자금시장에 빨간불
정부, 50조 이상 자금 공급 발표
긴축통화정책과 충돌 없게 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신뢰가 흔들리는 것은 빌려준 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는 뜻이다. 의구심의 첫째 원인은 빚이 너무 많아진다는 인식이다. 빚이 많다는 판단은 통계적으로도, 상대적·주관적으로 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면서 정부나 기업이나 부채가 엄청나게 늘었다. 팬데믹 위험이 사그라지면 정리할 문제였는데, 인플레이션이 덮치고 금리가 급등하면서 괜찮다 싶었던 규모의 빚도 많다고 인식됐다.

경기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투자자도 몸을 사리는데, 빚이 이미 많거나 빚을 늘리면 정부든 기업이든 요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정부 부채가 너무 많아 꼼짝달싹 못 하고, 영국은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나랏빚이 더 늘 거라는 우려 때문에 국채 가격이 폭락하고, 결국 리즈 트러스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퇴를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최근 회사채 시장 상황이 급속히 나빠졌다. 기존 빚은 부동산과 관련해 위기가 부각되고, 새로운 빚은 한전이나 은행들처럼 신용을 인정받는 기업들이 그 규모를 늘리면서 다른 기업들의 돈줄까지 말라가고 있다.

신용시장을 위축시키는 둘째 원인은 신용도에 대한 기존 판단 불신이다. 강원도가 레고랜드를 운영하는 강원중도개발공사(GJC)에 지급보증한 채권이 부도난 것은 신용도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를 깬 큰 사건이다.

어느 나라든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의 채권은 그 나라에서 최고의 신용도를 인정받는다. 그런 채권이 부도났으니 어느 채권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신이 생긴 것이다. 강원도의 결정이 지자체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수 있으나 한국의 신용 시장 전체에 부정적 파문을 일으켰다.

신용 시장이 흔들리는 것이 겁나는 진짜 이유는 실물 시장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2003년 신용카드 사태나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도 정부가 나서서 어렵게 상황을 진정시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신용 위기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간 환율이 급등하는 중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하던 정부가 신용 시장 경색에 기민하게 대응한 것을 보면 분명 또 다른 차원의 비상 상황이다.

이럴 때는 무엇보다 신속하게 유동성이 공급돼야 하기에 정부는 휴일임에도 대책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렇게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금리를 뛰게 하고 시중 유동성을 줄이는 긴축적 통화정책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잘 잡히지 않으면 기준금리를 계속 올려야 하고, 모두의 금리 부담이 커져 신용 시장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시장이 진정될 정도의 유동성 공급은 필요하지만 과해서도 안 된다.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경과를 되짚어 향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겉으로 볼 때 레고랜드 관련 채권이 부도난 것과 한전의 채권 발행이 급증한 것은 서로 무관한 사건이다. 하지만 위기는 악재가 우연히 겹쳐 생겨나는 법이다. 게다가 두 사건은 모두 공공부문이 국가 신용을 등에 업고 민폐를 끼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제에 지자체가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이 애초에 더 신중하게 시행되도록 할 기제가 마련돼야 한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한전의 적자가 어느 정도라도 해소되도록 전기요금을 발전 원가 등 현실에 맞게 올려야 한다. 어차피 전 정부가 만든 문제의 뒷수습은 현 정부의 몫이다. 하필 세계 경제가 이 모양이라 더 힘들겠지만, 시급히 할 일을 하고 신뢰를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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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