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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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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7년 전으로 기억하는 데 워싱턴특파원 시절 타사 특파원단과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이 간담회를 한 적이 있었다. 진지한 대화가 마무리된 뒤 농담을 섞어 북핵 억제에 의지가 전혀 없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의 핵 개발 가능성을 제기하면 어떻겠는지를 물어봤다. 사람의 기억은 요물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팩트는 희미해지는 반면 느낌은 선명하게 각인돼 계속 보존된다. 그때가 그랬다. 한 미국인 전문가가 나를 바라보며 정색하고 반박하는 데 그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분의 놀란 눈동자는 ‘말도 안 되는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단호한 감정을 내뿜고 있었다.

한·미 관계에서 한국의 핵 개발은 금기어다. 핵 개발에 관한 한 동맹은 없다. 한국이건 일본이건 한 치라도 의심스러우면 치고 들어오는 게 미국이다. 전술핵 재배치조차 꺼내기 쉽지 않은 이슈다. 전술핵 재배치는 비확산을 고수하는 미국에겐 대단히 껄끄럽다. 또 북한군의 신속 타격 범위에 있는 남한에 전술핵을 배치하는 건 군사 전략상 무의미한 조치가 될 수 있다. 이게 상식이다.

러시아의 우크라 핵 공격 위협
북한 전술핵에도 적용 가능해
한국 사회에 치명적 피해 입혀
미국에 핵공유 진전 요구할 때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하지만 세상이 상식에 따라 굴러가고 있지 않으니 문제다. 인류는 결코 핵무기를 사용해선 안 되며, 핵확산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게 푸틴과 김정은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밀리자 핵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고, 김정은 위원장은 대놓고 핵 무력으로 협박하고 있다.

북핵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지를 일깨워주는 게 푸틴이다. 미국 시사지 디 애틀랜틱이 지난 6월 제시한 푸틴의 전술핵 사용 시나리오에 따르면 경우의 수는 네 가지다. ①흑해에서 전술핵을 터트린다. 인명 피해는 없겠지만 다음엔 더한 게 온다는 핵 공격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②젤렌스키 대통령이 있는 지하 벙커 등을 때려 우크라이나 수뇌부를 제거하는 ‘참수’ 핵 공격을 한다. ③민간인 피해를 줄이도록 공군 기지나 보급 시설 등 우크라이나 군의 핵심 시설을 때린다. ④히로시마·나가사키 핵 투하처럼 우크라이나 도시에 전술핵을 떨어뜨려 대규모의 인명 피해를 준다.

푸틴이 핵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핵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내부를 공포 상태로 만들어 항전 의지를 꺾은 뒤 항복을 유도하고, 우크라 외부에선 대러시아 보복 방식을 놓고 서방 진영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푸틴의 전술핵 시나리오는 김정은의 전술핵 시나리오로도 적용 가능하다. ①동해에 핵미사일을 떨어뜨린다. 지금까지 핵 실험과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는 별개였는데 이를 하나로 결합해 동해의 가상 목표를 명중시킨 뒤 언제든 핵 공격을 할 수 있는 핵보유국임을 현실로 보여준다. ②용산 대통령실이나 한남동 관저로 전술핵을 날리는 북한판 ‘참수 핵 공격’을 감행한다. ③오산 미 공군기지 등 핵심 군사시설을 동시에 전술핵으로 때린다. ④처음부터 인구 밀집 서울로 핵탄두 단거리 미사일을 날린다. 핵미사일과 일반 미사일을 섞어쏘기로 쏘자 한·미는 패트리엇으로 대다수를 요격했지만 이중 전술핵 한두 기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뚫어 서울에 꽂혔다. 서울 한복판이 피폭되고 치명적인 인적·물적 피해를 보며 서울 인프라는 기능을 상실한다.

김정은이 노리는 건 선제 전술핵 공격 성공으로 남북 간 경제적·군사적 우열을 일거에 역전시켜 적화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② ③ ④번 경우의 수에서 한국 정부·군 지도부가 일시에 사라져 대응 시스템이 무너지고, 미국도 핵 전면전을 우려해 주저하다 보복 공격할 시간을 놓칠 경우 김정은의 핵 도박은 대성공으로 끝난다. 이후는 싸우지 않아도 북한이 이긴다. 한국 금융·자산 시장은 붕괴하고 한반도에선 거대한 자본 엑소더스가 벌어진다.

푸틴이 핵 공격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건 미국 등 서구의 보복 가능성 때문인 것처럼 김정은 역시 미군의 보복 공격을 통한 정권 패망 가능성을 감안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또 한국은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주한미군이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핵 공격은 결국 미국에 대한 핵 공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목마른 이가 우물을 찾아야지 남이 떠다 주는 물을 기다릴 때가 아니다. 현재 전술핵 재배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외교안보 당국자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전술핵 재배치라는 말이라도 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우리는 와 있다. 이제는 북한이 어디서 쐈는지도, 무엇을 쐈는지도 때로는 모르는 지경이다. 요즘 환율과 주가로 나라가 위기라는데 북핵은 단 한 방으로 환율·주식 시장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전술핵 재배치가 어렵다는데 그렇다면 핵공유에서라도 진전을 보자고 미국에 요구할 때가 됐다. 아니 이미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