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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토중래한 수낵 전 장관, 英총리 등극…첫 非백인∙1조 자산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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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리시 수낵(42) 전 영국 재무장관이 24일(현지시간) 보수당 대표 단독 후보로 출마하면서 79대 영국 총리가 됐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영국에선 집권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다. 지난 9월 초 당 대표 경선에서 리즈 트러스 전 총리에 밀려서 고배를 마셨던 수낵 전 장관은 49일 만에 총리 자리를 꿰찼다. 수낵 전 장관은 이르면 25일 찰스 3세 국왕의 재가를 받아 총리로 임명된 후, 새 내각을 구성할 예정이다.

영국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단독 출마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24일(현지시간) 선거운동 본부에 들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단독 출마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24일(현지시간) 선거운동 본부에 들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수낵 전 장관은 신임 총리로 확정된 직후 열린 보수당 비공개 회의에서 "우린 오직 한 번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며 "이제는 정책에 집중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BBC에 따르면 수낵 전 장관은 보수당 의원 약 200명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는 보수당 전체 의원(357명) 중 절반이 훌쩍 넘는 수치다. 그는 유일하게 당 대표 경선 출마 후보 등록 요건인 1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았다. 수낵 전 장관과 2파전이 예상됐던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전날 오후 불출마 선언을 했다.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는 후보 등록 마감 시한인 이날 오후 2시까지 동료의원 100명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모돈트 원내대표 측은 "90명 이상의 의원이 지지했다"고 주장하며 버텼지만 수낵 전 장관의 대세를 꺾지 못했다.

후보자가 한 명일 경우 다른 절차 없이 경선 결과를 확정하기로 해서 수낵 전 장관이 바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앞서 지난 20일 보수당 측은 트러스 전 총리가 감세 정책 후폭풍으로 44일 만에 사임하자 내각 안정을 위해 ‘스피드 경선’을 하기로 했다.

1980년 5월생, 만 42세인 수낵 전 장관은 지난 1812년 로버트 젠킨슨(만 42년 1일) 이후 210년 만에 최연소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 역대 최연소 총리는 1783년 24세 나이에 임명된 윌리엄 피트다.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주한 이민 3세인 수낵 전 장관은 초대 영국 총리 로버트 월폴이 취임한 1721년 이래 301년 만에 첫 비(非)백인 총리가 된다고 알려졌다. 다만 가디언은 "1874년에 총리직을 맡은 유대인 출신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있었다"고 전했다.

수낵 전 장관은 트러스 전 총리가 내놓은 감세 정책 후폭풍을 수습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한 물가상승 등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는 23일 출마 선언을 하면서 "우리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고, 내가 총리가 돼 영국 경제를 바로잡겠다"고 했다. 옥스퍼드대 PPE(철학·정치·경제학),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수낵 전 장관은 골드만삭스와 헤지펀드 등에서 근무한 금융인 출신이다. 지난 2020년 2월 재무장관에 취임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지난 9월 당 대표 경선에선 트러스 전 총리와 정반대로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 법인세를 19%에서 25%로 인상하고, 국민보험(NI) 분담금 비율을 1.25%포인트 인상하는 등 증세를 추진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위해 감세를 해야한다"는 트러스 총리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수낵 전 장관은 "동화같은 계획이라 경제위기를 몰고 올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보수당원들은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러스 전 총리가 지난달 재정 공백에 대한 대안이 없는 감세정책을 내놓자마자 파운드화는 급락하고, 정부의 차입 비용은 급등하며 전 세계 시장에 혼란을 일으켰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지난 20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총리직 사의를 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지난 20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총리직 사의를 표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후 트러스 총리의 감세 정책을 뒤집은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은 텔레그래프에 "수낵 전 장관은 자금 대책이 없는 감세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수낵 전 장관은 이제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의 경제위기 예언이 총리실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수낵 전 장관도 정치 경험이 부족해 트러스 총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가디언은 "수낵 전 장관은 하원의원 경력이 7년, 내각 장관 경력은 2년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대내외에서 발생하는 여러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폭넓은 경험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2015년 정계에 입문한 수낵 전 장관은 다른 장관 경력 없이 2020년 보리스 존슨 전 총리에 의해 바로 재무장관에 파격 발탁됐다.

특히 자중지란에 빠진 보수당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미지수다. 영국은 지난 2016년 6월 유럽연합(EU)을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결정한 이후, 약 6년 동안 보수당 소속 총리가 4번이나 낙마했다. 정치적 고비 때마다 총리를 압박하고 교체하면서 보수당 내에 분열이 생겼고, 영국인들의 신뢰도 뚝 떨어졌다. 영국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가 지난 20~21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보수당(19%) 지지율은 노동당(56%)의 3분의 1에 그쳤다. 가디언은 "보수당은 수낵 전 장관이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고 202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승리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리시 수낵 전 영국 재무장관이 지난 7월 16일 영국 북동부 티사이드의 건설현장을 방문할 때 명품 프라다 신발을 신었다. 로이터=연합뉴스

리시 수낵 전 영국 재무장관이 지난 7월 16일 영국 북동부 티사이드의 건설현장을 방문할 때 명품 프라다 신발을 신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수낵 전 장관이 일반 서민들이 겪고 있는 생활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심사다. 수낵은 의사 아버지, 약사 어머니 밑에서 부유하게 자란 금수저다.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억만장자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창업자의 딸 악샤타 무르티와 결혼해 부부의 총자산은 7억3000만 파운드(약 1조1910억 원)에 달한다. 총리가 되면 ‘전 세계 국가 수반 중 가장 부자’란 수식어를 얻을 수 있다고 NDTV가 전했다.

영국 이브닝 스탠다드는 "노동계층 친구들은 없다"는 발언과 물가상승 억제를 주장하는 연설 때나 건설현장을 찾아갈 때 명품 프라다 신발을 신고 가는 등의 행동으로 일부 영국인들에게 반감을 샀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수낵 전 장관을 지지하는 보수당 의원들도 그가 서민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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