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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대집사'가 中 넘버2 됐다…최악실수에도 살아남은 리창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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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① 리창

 23일 차기 총리에 내정된 리창 현 상하이 서기가 인민대회당 금색대청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외 기자 대면식'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경진 특파원

23일 차기 총리에 내정된 리창 현 상하이 서기가 인민대회당 금색대청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외 기자 대면식'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경진 특파원

“시진핑(習根平)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혁신은 현실과 역사를 연결하고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다. 사회주의 현대화의 웅대한 비전이 실천적으로 창조돼 마르크스주의에 찬란한 빛을 비췄다”

리창(李强·63) 상하이 당서기는 지난 18일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대표단 토론회에서 앞장서 시진핑 사상을 극찬했다. 지난 4월 상하이 봉쇄로 정치 생명까지 위협받는 듯했던 리 서기는 시 주석에 대한 절대 충성을 맹세하며 23일 중국 권력 2인자 자리를 꿰찼다. 이는 시 주석과 리창의 과거를 돌아보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2002년 저장성 부임한 시주석과 첫 인연

2005년 4월 8일 당시 시진핑 저장성 서기가 새로 개설한 중국예술학원 샹산캠퍼스를 시찰했다. 저장성 당 비서장이던 리창이 시 주석에 밀착 동행했다. 사진 저장일보 캡처

2005년 4월 8일 당시 시진핑 저장성 서기가 새로 개설한 중국예술학원 샹산캠퍼스를 시찰했다. 저장성 당 비서장이던 리창이 시 주석에 밀착 동행했다. 사진 저장일보 캡처

리창이 시 주석과 첫 인연을 맺은 건 20년 전인 2002년 푸젠(福建)성 당서기였던 시 주석이 저장(浙江)성 당 부서기로 부임하면서다. 시 주석은 이후 2003~2007년까지 4년간 저장성 당서기를 지냈다. 이 시기 리창이 저장성 당위원회 비서장이었다. 시 주석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자리였다.

대외적인 직무 수행에서 시 주석은 리창을 가장 많이 대동했다. “시 서기는 비서장 리창과 함께 핑양(平陽)을 방문, 사업을 고찰하고 지도”(2005년 5월24일자), “시 서기가 다천섬(大陳島)에 가 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리창이 동행”(2006년 8월 29일자)…당 기관지 저장일보에는 그의 수행 기록이 넘쳐난다. 리창은 이때부터 시 주석의 ‘대집사’로 불렸다.

리창은 노동자 출신이다. 1959년 저장성 루이안(瑞安)현에서 태어나 17살 때 농기계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저장농업대 닝보(寧波)분교를 졸업했다. 이후 24살이던 1984년 루이안현 청년동맹위원장을 거쳐 1989년 저장성 농촌구호과장이 됐다. 그후 10여 년간 저장성 지방 도시를 돌며 행정과 당 경력을 쌓았다. 저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시 주석에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제공하며 두터운 신임을 쌓았다.

시진핑 '심복'...'저장방' 선두주자 등극

2016년 5월 6일 당시 저장성장이던 리창은 지우얀 테크놀로지를 방문해 "기업가의 사명은 혁신에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저장일보 캡처

2016년 5월 6일 당시 저장성장이던 리창은 지우얀 테크놀로지를 방문해 "기업가의 사명은 혁신에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저장일보 캡처

리창을 필두로 시 주석의 이른바 ‘저장방’(浙江幇) 인맥도 이때 완성됐다. 당시 선전부장이던 천민얼(陳敏爾·현 충칭시 당서기), 저장성 항저우시장이었던 차이치(蔡奇·20기 정치국 상무위원·베이징시 당서기), 저장성 자싱(嘉興)시장 황쿤밍(黃坤明·현 중앙선전부장) 등 ‘즈장신쥔’(之江新軍)으로 불리는 이들은 현재 시 주석의 최측근 고위직으로 자리 잡았다.

2013년 시진핑이 국가 주석에 오르자 지지를 등에 업은 리창도 승진 가도를 달렸다.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저장성 성장(省長)으로 발탁됐다. 리창은 인사 발표 당일 밤 곧바로 간부 회의를 소집해 “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법에 의한 행정을 근본으로 하며,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저장일보, 2013년 1월 13일)는 ‘법약3장’(法約三章) 원칙을 밝혔다. 시 주석의 ‘의법치국’(법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린다) 방침을 철저히 따를 것이란 공개 맹세였다.

이어 “서두르지 않으면 5년은 눈깜빡할 새 지나간다. 분초를 다투고 실무적이고 진취적으로 일해야 한다”며 “성장으로서 나는 성 정부의 사업에 대해 총책임을 지겠다. 간부들이 권한에 따른 책임을 져야 정부의 집행력과 행정 효율이 제고된다”고 행정책임주의를 강조했다.

상하이·저장·장쑤, 장강 이남 3개 성 최고 책임자

2017년 리창은 저장성 성장, 장쑤성 당서기를 거쳐 상하이 서기로 임명됐다. 사진 바이두 캡처

2017년 리창은 저장성 성장, 장쑤성 당서기를 거쳐 상하이 서기로 임명됐다. 사진 바이두 캡처

홍콩 명보는 “리창을 접촉한 상공계 인사들은 그가 온건하고 사유가 개방적이라고 칭찬한다”는 세간의 평가를 전했다. 리창은 3년 간 저장성 성장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 저장성 국민총생산(GDP)는 2013년 3조7757억 위안(약 750조)에서 2016년 4조6485억 위안(약 930조)으로 매년 8% 이상 늘었다.

이후 리창은 장쑤(江蘇)성 당서기를 거쳐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한정의 뒤를 이어 상하이 당서기로 영전했다. 5년 새 저장ㆍ장쑤ㆍ상하이까지 중국 경제 발전 핵심으로 등극한 장강(長江) 이남 3개 성의 최고 책임자를 섭렵했다. 특히  2018년 시 주석이 '장강 삼각주(저장성·장쑤성·안후이성·상하이시) 3성1시 통합 개발'을 국가 전략으로 내세웠고 리창은 이를 진두지휘했다.

상하이 당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하는 ‘1순위 티켓’이었다. 지난 2006년 비리로 낙마한 천량위(陳良宇·76)를 제외하고 상하이 당서기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지 못한 이는 없었다.

상하이 봉쇄로 정치 위기..."재등용은 더 충성하게 만들려는 것"

지난 4월 11일 상하이시 징안구 봉쇄 현장을 찾은 리창 상하이 서기가 주민들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지난 4월 11일 상하이시 징안구 봉쇄 현장을 찾은 리창 상하이 서기가 주민들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순조로운 듯 보였던 리창의 행보는 지난 3~5월 상하이 봉쇄로 위기를 맞았다. 시민들은 현장을 찾은 그에게 “당신은 나라에 죄를 지었다. 부끄럽지도 않냐”며 비난했다. 회복 기미를 보이던 중국 경제는 올 2/4분기 경제성장률 0.4%로 추락했다. 문책론이 비등했지만 시 주석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봉쇄 전까지 리창은 상하이의 방역과 경제 개방을 비교적 균형감있게 관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닐 토마스 유라시아그룹 수석 분석가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관리에 실패한 리창을 승진시킨 것은 오히려 그를 총리로서 시진핑에게 더 충성스럽게 만들 것”이라며 “동시에 코로나 봉쇄 정책을 이견없이 따르라는 무언의 신호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천강(陳剛)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리창이 총리가 되면 시주석이 경제·사회 정책 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개혁 개방은 계속되겠지만 속도는 느려질 것이며 강력한 방역 정책도 계속 시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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