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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예의 톡톡일본

'삼계탕 자판기'는 기본…절에서 '햄버거'도 판다, 일본의 변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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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지난 20일 일본 도쿄(東京) 시나가와(品川)구의 한 주택가.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대로변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자판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설치된 자판기는 모두 10여 대. 아이스크림부터 빵, 캐비어에 소고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한국 반찬’이라고 써 붙인 자판기 두대엔 간장게장과 양념게장, 떡볶이, 김치찜 등 낯익은 음식들이 소개돼 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자판기 전문점 ‘피퐁(Pippon)’이다. 삼계탕은 1200엔(약 1만1600원), 떡볶이는 880엔(약 8500원)이면 살 수 있는데, 모두 냉동 상태로 판다. 잠시 청소차 들린 나이토 다이스케 (内藤大輔) 사장은 “좁은 공간에서도 무인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다양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건 한국음식.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손님들이 출·퇴근길에 많이 산다”고 말했다.

자판기 전문점 피퐁의 나이토 다이스케 사장은 "좁은 공간에서도 무인으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 유행으로 한국음식이 많이 팔린다"고 전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자판기 전문점 피퐁의 나이토 다이스케 사장은 "좁은 공간에서도 무인으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 유행으로 한국음식이 많이 팔린다"고 전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자판기의 나라' 일본의 변신 

단일 국가로 자판기 보유량이 세계 1위인 일본. 이 일본에서 자판기 시장이 변하고 있다. 라면은 물론, 아이스크림, 만두 같은 식품 자판기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자동판매시스템기계공업회에 따르면 일본 내 자판기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10년만 해도 520만6850대였지만 지난해엔 400만3600대로 줄었다. 음료수 자판기(56.2%)가 전체 시장의 절반이 넘는데, 포화 상태를 지났다는 의미다. 주춤하는 자판기 시장에서  변화를 이끄는 건 그간 관심받지 못했던 식품(1.8%) 분야다. 하마다 유지 KOTRA 오사카 무역관은 “음료수 자판기가 줄고 냉동 자판기가 늘면서, 군고구마나 육수 등 특이한 제품을 파는 자판기가 출현하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케이크, 푸딩에 회까지

변화의 물꼬를 튼 건 코로나다. 사람들이 대면 접촉을 꺼리게 된 데다, 방역대책으로 영업시간마저 줄면서 상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나이토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건축 관련 사업을 해오다 코로나로 매출이 급감했다. 자판기라면 코로나 걱정 없이 해볼 수 있지 않겠냔 생각에 자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음료수가 아닌 음식을 택했다. 캐비어는 물론, 소고기, 반찬류까지 뭐든지 팔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나고야(名古屋)의 한 이탈리안 음식점도 올해 들어 가게 앞에 자판기를 설치했다.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냉동 파스타와 피자를 판다. 자판기 설치로 24시간 영업이 가능해지면서 숨통이 트였다. 올들어선 케이크와 푸딩, 회, 불고기까지 파는 곳도 생겨났다. 가나자와(金沢) 시에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심 지역에 지난 6월 회를 사 먹을 수 있는 자판기를 설치했다. 500엔(약 4800원)에서 2000엔(1만9400원)이면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는데 금세 동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도쿄 최대 재래시장인 우에노 아메요코시장엔 곤충식품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귀뚜라미 쿠키 4개 들이에 950엔이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 최대 재래시장인 우에노 아메요코시장엔 곤충식품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귀뚜라미 쿠키 4개 들이에 950엔이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곤충 식품 파는 시장, 햄버거 파는 절…이색 자판기 성업 중

모객을 위한 이색 상품을 파는 곳도 생겨났다. 말하자면 이색 상품을 파는 자판기로 사람들을 불러들이자는 전략이다. 도쿄 우에노(上野)에 있는 도쿄 최대의 재래시장인 아메요코(アメ橫)엔 곤충 식품 자판기가 있다. 귀뚜라미 쿠키부터, 거미인 타란툴라, 전갈까지 식용 곤충을 활용한 제품을 파는데, 이곳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이색 상품 자판기로 입소문을 타고 손님들을 모으고 있다.
4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히로시마(広島) 한 사찰에선 지난 1월 햄버거 자판기를 설치했다. “어느 절에도 햄버거는 없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는데, 코로나로 발길이 줄어든 방문객을 늘리고 수익금으론 어린이 지원사업을 하기 위한 주지 스님의 아이디어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고령화도 일본 자판기 시장 변화에 한몫을 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올 1월 외국인 포함 거주자 기준 일본 인구는 총 1억2592만8000명. 13년째 줄고 있다. 고령화 속도도 빠른데, 일본 후생노동성은 오는 2025년엔 만 65세 이상의 어르신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면서 일본은 무인 자판기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일부 편의점에서는 AI(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로봇이 직원 대신 물건 진열을 하기 시작했다. 일반 상점에선 사람을 쓰기보다 식권 자판기를 두는 일이 흔해졌다. 야노경제연구소는 “고령화로 인한 인력 부족, AI(인공지능) 기술 발달로 무인점포가 증가하면서 자판기 시장이 완만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지난 9월 한 시민이 일본 긴자역 지하철에 설치돼 있는 과일 자판기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지난 9월 한 시민이 일본 긴자역 지하철에 설치돼 있는 과일 자판기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일각에선 자판기를 인구 감소로 대형 마트가 사라지면서 물건 살 곳이 없어진 ‘쇼핑 난민’을 위한 대안으로 보기도 한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주임연구원은 “대형 슈퍼가 퇴점한 지역이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기 힘든 고령자 등 이른바 '쇼핑 난민'에 대한 대책으로 자동판매기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즈오카(静岡)현엔 소형 슈퍼가 늘어나고 있는데, 냉동 자판기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존 슈퍼 크기의 6분의 1 규모로 어르신들이 많이 걷지 않고도 이용 가능한 데다, 1인분 중심의 식재료를 팔아 호평받고 있다. 김 연구원은 “노동력 부족으로 발권기와 같은 판매기는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라며 “고령화로 치매 어르신이 증가하고 있어 자판기에 통신망 기능을 추가해 치매 어르신 대책으로도 사용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