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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병주의 시선

대법원ㆍ헌재 권위, 누가 깎아먹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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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876억여원이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최고 사법기관이라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권위 다툼 때문이다. 헌재는 지난 7월 GS칼텍스·롯데디에프리테일(옛 AK리테일)·KSS해운에 세무당국이 부과한 세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같은 사안 두고 서로 다른 판단 

GS칼텍스의 경우 1990년 상장하려는 기업에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옛 조세감면규제법에 근거해 자산 재평가를 하고 주식 상장을 추진했지만 2003년 상장을 포기했다. 세무 당국은 개정 이전 법령의 부칙에 따라 1990년도 이후 법인세 등을 다시 계산해 세금 707억원을 부과했다. 이에 GS칼텍스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2008년 세무 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헌재는 2012년 대법원의 판단을 뒤집고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GS칼텍스는 이를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서울고법은 “한정위헌 결정은 법률조항을 해석·적용한 것이지 조항 자체가 헌법에 위반되는지 판단한 것이 아니다”며 소를 기각했다. 그러자 GS칼텍스는 대법원의 판결과 서울고법의 재심 기각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헌법소원을 냈고, 헌재는 법원의 판결 자체를 취소하는 결정을 9년 만에 내렸다.

권리구제 못 받는 상황 만들어 

그렇다고 달라진 건 없다. 이들 회사는 대법원과 서울고법에 또다시 재심을 청구한 상태다. 하지만 대법원이 “헌법상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판단에 대하여 법원 외부의 기관이 그 재판의 당부를 다시 심사할 수 없다”고 못박아버려 결론이 바뀌기 어렵다. 대법원과 헌재 간 권한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이 사달의 근원이다. 기업들은 법원이 기각하면 또다시 이 기각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국정감사장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박종문 헌재 사무처장은 “이제 국회에서 입법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1항에서는 법률의 위헌결정은 법원과 그 밖의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를 기속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한정위헌 역시 위헌결정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명시해달라는 것이다.

이영진 헌법재판관이 지난 13일 출입국관리법 63조 1항 위헌제청사건 공개변론을 위해 헌재 대심판정에 입장해 있다. 연합뉴스

이영진 헌법재판관이 지난 13일 출입국관리법 63조 1항 위헌제청사건 공개변론을 위해 헌재 대심판정에 입장해 있다. 연합뉴스

헌재 스스로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골프 접대 의혹에 연루된 이영진 헌법재판관이 헌재의 결정에 계속 관여하고 있는 게 상식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헌재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 사형제, 국가보안법과 같은 중대한 사안에 대한 위헌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이 재판관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를 받고 있다. 무고하다 하더라도 결론이 나올 때까지 각종 결정에 그의 의사가 반영되는 게 합당한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권위 다툼 앞서 내부 정화해야  

대법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지난달 26일 취임 5주년을 맞은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의 날 기념사에서 사법행정에 대해 “종전의 폐쇄적이고 관료화된 모습에서 벗어나 국민과 법원 구성원의 요구가 합리적으로 반영되는 수평적이고 투명한 구조로 탈바꿈해 나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뉴스1

법원 안팎의 평가는 다르다. 오히려 그가 취임하기 전보다 법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결혼해 직장까지 있는 아들 부부가 공관에서 함께 살며 ‘공관 재테크’ 의혹을 샀고, 며느리는 자신이 일하는 기업 법무팀을 공관에 불러 만찬을 했다.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을 요직에 앉히는 편파 인사 탓에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공식 항의를 받기도 했다. 2020년 임성근 전 부장판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표를 내겠다고 하자 “(민주당이 임 부장판사를) 탄핵하자고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를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며 거부한 것과 관련해 김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 대상이 됐다. 이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임 전 부장판사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거짓말로 드러나 고발당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재판 지연이 가장 큰 문제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한 후 2년 이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사건이 민사소송은 3배, 형사소송은 2배로 늘어났다. 법원을 개혁하겠다며 법원장 후보추천제도를 도입하고, 고법 부장 승진제도를 폐지한 게 큰 이유로 해석된다. 사건처리율도 판사들의 인사고과 항목에서 제외했다. 실력이 없더라도 구성원들의 환심을 사면 법원장이 될 수 있고, 열심히 일해도 성과를 평가받을 방법이 줄다 보니 의욕이 사라졌다는 말들이 나온다. 오죽하면 1주일에 판결문을 2개만 쓰겠다는 ‘당당한’ 판사들도 생길까.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받고 있다. 워라벨 찾기와 권위 다툼보다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호하려는 진지한 모습을 김 대법원장부터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