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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통증의 기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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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의료환경 자체가 사실은 의료인의 건강에 우호적이진 않다. 역설적이다.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만큼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도 간호사도 신이 아닌 이상 허점은 있기 마련이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환자의 사소한 상태 변화에도 오감을 집중하며,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이로 인해 늘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상실을 조절하는 일이다.” 프랑스 의사였던 마르탱 뱅클레르의 『아름다운 의사 삭스』 중 한 구절이다. 삭스에게는 글 쓰는 일이 직업에서 오는 압박을 해소하는 인간으로서의 방어막이었을 것이다. 작은 소도시 의사 삭스가 겪는 환자들의 애환과 의료체계에 대한 분노를 가공하지 않고 기록한 통증의 기록이며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사샤의 병’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삶을 아프게 하는 것들의 인과 관계를 흔치 않은 의술의 관점으로 응시한 수작이다.

의사 뱅클레르가 남긴 진료기록
희망과 고뇌의 시간 빼곡히 담겨
차트는 환자 관점에서 작성해야
의사가 꿈꾸는 환자와 공감 형성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소외당한 환자들의 모든 병력을 진료기록지에 세심하게 기록하는 삭스는 괴로움, 번민, 야만적 폭력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의사로서의 무기력함을 느낀다. 때론 건조하고 냉정해야 할 환자들의 상황 속에서 인간에 대한 감정이입이 의사의 존재 이유이자 한계라는 현실 앞에 삭스는 힘겨워한다. 그래서인지 삭스의 진료기록지는 질병의 도식적 기록을 나열하기보다 환자의 감정 상태를 구어체로 기록한 공감의 기록으로 쓰인다. 현대 의료체계의 속도전 환경 속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병원에는 수많은 환자의 진료기록을 의무적으로 저장한다. 대학병원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개원의 역사가 오래된 병원이라면 빼곡히 들어찬 차트를 찾고, 반납된 차트를 다시 분류·정리하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과이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아날로그에 머물던 시대에 태어난 세대로서 전자의무기록지라 불리는 EMR보다는 진료기록지가 익숙하다. 어쩌면 모르는 타인과 펜팔을 주고받고 최대 입력 글자 수가 제한된 문자메시지에 응축된 편집의 말들을 구겨 넣던 세대의 의사라면 이내 공감할 터이다.

진료기록지에는 외래 초·재진 기록지와 입원 경과 기록지, 소견서, 간호기록지, 수술기록지, 진단검사 결과지, 투약 기록지, 처방전 등이 빠짐없이 기록된다. 아픈 이들의 통증의 시간은 병원을 찾은 순간마다 박제되며 남겨진다.

의사로서 한 권의 차트가 가진 소중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진료기록지를 작성할 때에는 매사가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병원 한편에 길고 높게 줄지어 서 있는 차트들, 그 속에 꽂혀있는 차트 한 권, 한 권에는 환자의 희망과 의사의 고뇌가 담겨 있다. 길게 늘어선 진료기록지의 행렬을 바라볼 때는 마치 외세의 침략을 막아서며 구국의 신념으로 조각된 팔만대장경을 보는 듯싶다. 과하지 않을 비유인 것이 인간의 생로병사만큼 소중한 기록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이다.

환자 상태에 따라 지금은 옳은 치료방법이 나중에도 옳다는 보장이 없다. 의사로서의 합리적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무한 책임의 집요한 일상의 질문이다. 환자의 질환에 대한 확고한 치료 확신은 경과라는 입증된 시간만이 과학성과 합리성을 내재한다. 이를 지탱하는 방법이 진료기록부라는 오래된 생각을 여태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태산처럼 쌓여 가는 진료기록부 중에는 끝내 완쾌라는 환자로부터의 채무를 끝내 변제 못 하고 남겨진 빚도 있다.

소설 속 삭스가 보기에 오늘날의 의사들은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라기보다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력자’로 묘사된다. 의사들의 권력과 명예에 대한 의지를 다음과 같은 병명에서 발견한다. 다운 증후군,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등등. 그러나 이 질병의 작명은 모두 그 병을 앓은 환자들의 이름이 아닌 그 환자들을 치료하지 못했던 의사들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미완의 의술에 대한 헌정이라면 자칫 오만하다. 환자의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료기록부에 환자와의 첫 대면, 감정 상태, 통증의 한탄, 회복을 위한 노력이 환자의 언어로 세심하게 기록된다면 모든 의사가 꿈꾸던 환자와의 공감은 형성될 것이다. 삭스의 말처럼 진료기록부는 잡아둘 수 없는 것을 헤아려 보게 해주는 기록이다. 겁먹은 아이에게 청진기를 댈 때면 손바닥을 문질러 찬기를 사라지게 한 이후에야 갖다 대는 몸짓처럼.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