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의 '나비 효과'…8% 금리 내걸어도 '돈맥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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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강원도 레고랜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로 자금 시장 경색이 심화했다. 셔터스톡

이달 초 강원도 레고랜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로 자금 시장 경색이 심화했다. 셔터스톡

“금융 업계에서 통용돼온 ‘신용’의 근간이 무너졌다.”
‘레고랜드 사태’를 바라보는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의 탄식이다. 레고랜드 사태는 강원도가 지급 보증을 약속했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부도 처리된 사건이다. 강원도가 뒤늦게 보증 채무를 갚겠다고 나섰지만 회사채·기업어음(CP) 등 자금 시장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는 "지자체가 보증하는 CP도 믿지 못하게 된 판국에 증권사나 건설사에서 보증하는 CP에 누가 투자하겠느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PF ABCP란 부동산개발사업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대출채권을 기반으로 만든 기업어음이다. 증권사는 특수목적법인(SPC)이 부동산 시행사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ABCP에 신용 보강(매입보장·매입확약)을 하고 수수료와 이자 차익을 받아왔다. 부동산 경기가 호황을 이루며 지난해까지 PF ABCP는 증권사에 수익을 안겨주는 효자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연초부터 기준금리가 올라가고, 부동산 경기가 꺾이자 PF ABCP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레고랜드 사태로 PF ABCP 부실 우려 증폭 

이런 상황에서 레고랜드 사태는 PF ABCP 부실 우려를 증폭시킨 ‘트리거’가 됐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연초 1.55%였던 기업어음(CP)금리는 21일 기준 4.25%로 급등했다. 지난달 말 3.27% 수준에서 레고랜드 사태 이후 1%포인트 가까이 치솟았다.

증권사·건설사가 보증을 선 유동화증권은 차환발행에 실패할 경우, 물량을 해당 증권사와 건설사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23일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18일부터 이달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증권사 신용보강에 의한 단기 PF 유동화증권(ABCP·ABSTB) 발행 잔액은 6조7000억원, 다음 달엔 10조7000억원에 이른다. 건설사 신용보강에 의한 단기 PF 유동화증권 발행 잔액 역시 월말까지 2조1000억원, 다음 달 2조8000억원으로 불어날 예정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8% 금리 내건 ABCP도 거래 안 돼 

하지만 투자 심리가 급격하게 위축돼 높은 금리에도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상태다. 증권사는 ‘역마진’을 감수하며 높은 금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시장 반응은 싸늘하다. 신용등급 A1~A2 증권사가 보증하는 8~10%대 금리(3개월 확약) ABCP 발행도 수요에 미달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달 초 한화투자증권이 매입 확약을 한 3개월물 자산 유동화물은 최대 8.2% 금리를 내걸었는데도 거래가 체결되지 못했다. 교보증권(7.8~8%)과 미래에셋증권·한국투자증권(6.8~7%) 등의 자산 유동화물도 겨우 투자자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 관계자는 “‘역마진’ 금리를 내걸면서까지 차환 발행을 이어갈지 ABCP를 떠안을지 고민에 빠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홍성기 나이스신용평가 SF평가1실장은 “아직은 증권사가 보유한 유동성으로 차환발행 물량이 소화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건설사·증권사의 신용 위험이 커지게 될 것”이라며 “현재 차환 발행되는 PF 유동화증권의 만기가 1개월 내외로 줄어들고 있는 현상도 위험을 가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소형 증권사 PF 부실 전이 우려     

대형 증권사는 자본금으로 채무를 상환할 수 있지만 중소형 증권사는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대형 증권사는 자기자본 대비 부동산 PF 익스포저 비율이 35% 수준인 데 비해 중소형사는 50%에 달한다. 김은기 삼성증권 수석 연구위원은 “PF ABCP 매입 규모가 큰 중소형 증권사 유동성 우려도 커지고 있다”며 “이런 우려에 신용 스프레드(국고채와 회사채 금리 차) 확대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지난 20일 1조6000억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화펀드(채안펀드)’를 투입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채권시장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21일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4.495%에 장을 마쳤다. 10년물 금리는 연 4.632%로 연고점을 기록했다. 이는 2011년 3월 8일(연 4.68%) 이후 최고치다. 시장의 불안감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금융투자업계는 꽉 막힌 자금시장에 숨통을 트여주기 위해선 보다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18일 나재철 금융투자협회 회장이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시장 안정화 대책을 요청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정부, 50조 유동성 공급책 가동…“시장 우려 해소 계기” 

자금시장 경색 우려에 23일 정부는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키로 했다. 우선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이 운영하는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매입 한도를 16조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또 증권사들이 PF ABCP 차환 등으로 자금난을 겪을 것에 대비해 3조원 규모 자금도 지원한다. 제2 레고랜드 사태 방지책으로 지자체가 보증한 ABCP는 모든 지자체가 지급보증 의무를 이행하도록 했다.

금투업계 관계자는 “시장에 자금이 없어서 위기가 닥쳤다기보다는 심리적인 영향으로 회사채 시장과 단기 자금 시장이 경색된 측면이 컸다”며 “이번 대책을 통해 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돼 ‘돈맥경화’가 풀리고, 시장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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