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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카톡 먹통과 워라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0호 30면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출근 첫날 부서, 팀, 팀장 제외한 팀원 전체, 연관 부서 등 10여개의 방에 순식간에 초대받았어요.”

일본 기업에 근무하다 지난해 말 귀국한 김현수(34)씨는 국내기업으로 이직한 뒤 단톡방 문화에 가장 놀랐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회사 업무에 메일을 주로 쓴다. 김씨는 “일본에서는 동료의 개인 전화번호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에 근무하는 이영준(32)씨도 비슷한 경험을 들려줬다. 집에서 회사 노트북을 켜자 당장 매니저가 연락해 “특별한 사유 없이 업무 시간 외에 노트북을 쓰면 해고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목욕탕에도 전화 들고가던 기성세대
‘직장에 헌신’ 이해 못하는 MZ와 갈등

국내에서도 노트북 반출을 금지하거나 퇴근 이후 업무시스템 접속을 막는 기업이 늘고 있다. 보안 목적이 크다. 김씨의 회사도 공식적으로는 단톡 사용을 금지한다. 하지만 업무 편의 등을 이유로 알음알음 메신저를 활용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지난 주말 내내 카카오 서비스가 먹통이 된 것을 계기로 메신저에 대한 과도한 의존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갤럽이 21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9%가 ‘불편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연령별로 보면 20·30대에서는 70%를 웃도는 반면 70대 이상에서는 26%에 그쳤다. 젊은 세대일수록 의존도가 높다는 얘기다. 그만큼 불만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반응은 조금 달랐다.

30대 후반의 한 직장인 후배는 “오랜만에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즐긴 것 같다”고 말했다. 부서장의 맛집 기행과 등산 사진에 ‘좋아요’ ‘멋져요’라고 응답하지 않아도 되니 세상 편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참에 회사에서 메신저 사용을 금지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반면 상장기업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50대 임원은 “주말 내내 단톡방이 먹통인데 비상연락망을 점검하는 직원이 한 명도 없더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급한 연락을 놓칠까 봐 목욕탕에도 휴대전화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들어가곤 했다”며 “요즘 친구들은 업무에 대한 열정이 예전과는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온도차는 직장에 대한 생각이 변화한 것을 상징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소극적으로 일하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논란이다. 지난 7월 “일이 곧 삶은 아니고, 당신의 가치가 업무 성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IT 엔지니어 자이드 펠린)는 17초짜리 동영상이 올라왔다. 댓글 4500개, 좋아요 49만개가 달렸다. 이에 대해 기성세대가 “단지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삶을 그만두는 것”(허핑턴포스트 창업자인 애리애나 허핑턴)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이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MZ세대 직장인들의 최우선 목표가 된 지 오래다. 지난해 12월 구직플랫폼 사람인에서 직장인 329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대의 78.5%와 30대의 77.1%가 “딱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답했다. 50대(40.1%)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카카오 먹통 사태에 정작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덤덤한데 기성세대가 더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은 ‘일의 정의’가 바뀌는 시대 흐름을 반영한다. 몇 년 전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로 시작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으로 끝나는 글귀가 화제가 됐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으로 보이는 이 글은 MZ세대에게는 소름 돋는 주문일 뿐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지난 5일 ‘트렌드코리아 2023’을 내놓으며 “승진보다 업무환경, 조직보다 개인, 평생직장보다 조기 은퇴가 중요한 ‘오피스 빅뱅’ 시대”라고 언급했다.

지난해 말 잡코리아 조사에서 20·30대 직장인의 37%가 1년 안에, 27%는 2년차에 퇴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늘구멍이라는 취업 관문을 뚫은 젊은 인재가 자꾸 회사를 떠난다면 ‘가족 같은’ 열정과 헌신을 강요한 것이 아닌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장 단톡방부터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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