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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보필 손탁의 집, 와인 마시며 정탐 외국인 아지트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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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호 22면

와글와글 

손탁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캐나다 대사관과 수령 500년 정동 회화나무. 고종은 고마움의 표시로 손탁에게 러시아 공사관 부근에 집 한 채를 마련해줬다. [사진 손관승]

손탁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캐나다 대사관과 수령 500년 정동 회화나무. 고종은 고마움의 표시로 손탁에게 러시아 공사관 부근에 집 한 채를 마련해줬다. [사진 손관승]

세기말인 1898년 1월 4일, 국내 영문판 독립신문 ‘디 인디펜던트’에 흥미로운 광고가 게재된다. “요리는 최상의 프랑스 스타일. 식료품 상회에는 새로 입하된 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산 와인과 병조림이 갖추어져 있음.” 같은 해 2월 광고에는 “스위스 및 이탈리아 치즈, 이탈리아산 와인과 소시지, 캘리포니아산 와인과 코냑, 럼주 매일 대기 중”, 3월 29일에는 “샴페인, 상급의 라인 및 모젤와인, 독일 맥주가 도착했다”고 알리고 있다.

일부 내용만 수정한 채 11월까지 비슷한 광고가 계속 등장하는데, 광고주는 ‘서울 호텔’의 삐이노(Bijno, 邴魯)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인으로 아마도 한반도 최초의 포도주 광고일 듯싶다. 잡화점과 함께 운영하던 호텔의 위치는 ‘황궁 구내’라 되어 있지만, 덕수궁의 어디 부근인지 확실치 않다. 삐이노는 서울에서 약 2년 남짓 사업을 하다가 근거지를 제물포로 옮겼다고 한다.

손탁호텔 터를 알리는 표식과 이화 박물관. [사진 손관승]

손탁호텔 터를 알리는 표식과 이화 박물관. [사진 손관승]

정동길은 이처럼 구한말 라이프스타일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한복 대신 양복, 초가집이 아닌 양옥, 젓가락이 아닌 포크 등 서양식 생활문화가 선보였다. 지금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인 커피 문화와 와인 풍습도 덕수궁 주변을 통해 퍼져나갔으니 정동길은 서양식 라이프스타일의 플랫폼 역할을 했다. ‘일상의 역사’란 관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양식 생활양식이 서울보다 앞서 들어온 곳은 인천으로 1880년대 이래 일본인 호리 큐타로가 운영한 대불호텔, 중국인 이태의 스튜어드 호텔,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의 꼬레 호텔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꼬레 호텔의 존재. 호텔 내에 다양한 외국 술을 갖춰놓은 살롱이 있었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던 주인의 젊은 딸이 카운터 너머로 술잔을 건네주었기 때문에 제물포항에 정박한 각국 해군들에게 휴식처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 호텔의 와인 판매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순우의 책 『손탁호텔』에 따르면, 제물포의 호텔들은 그러나 인천~서울 철도가 개설되면서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커피와 와인도 관문인 인천에서 먼저 선보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대부분 한국인이 아닌 서양인들이 소비 대상이었고 그나마도 주도권을 정동길에 넘겨주게 된다. 1883년 덕수궁 뒤편에 미국공사관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영국·러시아·독일·벨기에 등 서양 공관들이 앞다퉈 들어서게 되는데, 서양인들은 이 길을 가리켜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라 불렀다.

외교 고문 파울 게오르그 묄렌도르프로. 고종에게 커피와 서양식을 소개한 인물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외교 고문 파울 게오르그 묄렌도르프로. 고종에게 커피와 서양식을 소개한 인물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는 1883년 11월 한국 방문 때 독일인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대접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 독일인이란 ‘목참판(穆參判)’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묄렌도르프를 말한다. 그는 약 3년간 고종 옆에서 외교 자문을 담당하며 국제 조약체결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고종이 커피와 서양 음식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명성황후 민비가 개혁파 박영효를 회유하기 위해 내놓은 것은 낙장(酪漿), 즉 치즈였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5년 왕궁 방문에서 저녁 식사로 수프를 포함한 서양식 요리, 적포도주와 커피, 케이크를 대접받아 놀랐다고 증언하고 있다.

왕실에 프랑스 음식을 요리해주고 와인을 서비스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스 손탁(孫澤)’으로 알려진 앙트와네트 손탁이다. 알자스 지방 태생으로 독일 국적이며 1885년 32살의 나이에 정동길에 와서 24년을 정동에서 보냈던 서양 여성이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추천으로 명성황후에게 서양식 음식과 의전, 인테리어 등을 조언하다 신임을 얻어 고종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신비의 여성이다. 그녀는 최고의 프랑스 요리를 선보인 마법의 손을 갖고 있었으며 독일·프랑스·러시아·영어에 한국어까지 구사한 탁월한 언어능력의 소유자로 왕실 연회를 도맡아 치르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아관파천 했을 때 손탁이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고종은 손탁이 요리해준 다양한 서양 음식과 커피를 좋아하게 됐으며, 그녀에게 요리뿐 아니라 은밀한 비자금 심부름과 밀사 역할까지 맡겼는데, 배달 사고 없이 잘 수행했다. 고종은 고마움의 표시로 러시아 공사관 부근에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곳은 점차 서울 주재 외국인과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현재의 캐나다 대사관 자리 부근으로 추정되는 손탁의 사택에서는 포도주가 흐르고 샴페인이 넘치며, 그 어깨너머로 왕실의 내밀한 정보와 동향을 탐지하려는 각국 외교관들의 치열한 정보수집이 펼쳐졌으니 한반도 스파이 전쟁의 최전선이었던 셈이다.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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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은 1902년 내친김에 길 건너편에 반듯한 2층 서양식 호텔을 지어 개관하게 되니 그곳이 손탁호텔, 혹은 손탁빈관(孫澤儐館)이다. 훗날 영국 총리에 오르게 되는 처칠이 러일전쟁 취재 때 투숙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체류하며 을사늑약을 진두지휘하였고, 1층에는 커피숍이 있어 이 땅에 본격적인 커피문화를 알렸다는 사연 많은 곳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손탁의 운명에도 변곡점이 생긴다. 그녀는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호텔의 경영권을 넘긴 뒤 사반세기에 걸친 정동 생활을 청산하고 1909년 한국을 떠난다. 보에르를 스파이로 의심해 밀고자에게 매수비를 지급한 일본의 극비 동향 보고서가 남아 있는 것을 감안하면, 손탁도 일본의 주요 사찰 대상이었으리라.

손탁호텔은 이후 이화학당에 넘겨져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22년 헐리게 된다. 공교롭게도 호텔 건물이 사라지던 같은 해에 손탁도 프랑스 칸에서 숨을 거두게 되니 100년 전의 일이다. 근대역사에서 손탁만큼 많은 영향을 끼친 서양인도 드물지만, 이화100주년 기념관에 ‘손탁호텔 터’라는 표석만 달랑 남아 있을 뿐이다. 수령 500년의 정동 회화나무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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