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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군민 상대 ‘광야의 꽃’ 가라유키, 발빠르게 만주 진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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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8〉

1차로 일본에 귀환한 만주(당시는 동북)의 일본인 고아들. 1948년 겨울, 도쿄 시나가와(品川) 역. [사진 김명호]

1차로 일본에 귀환한 만주(당시는 동북)의 일본인 고아들. 1948년 겨울, 도쿄 시나가와(品川) 역. [사진 김명호]

일본의 만주진출은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빨랐다. 20세기가 동트기 전 바이칼호 동부의 한적한 도시에 일본 여인들이 족적을 남겼다. 가라유키, 중국인들이 탕싱샤오제(唐行小姐)란 예쁜 명칭으로 부르던 이 여인들은 해 질 무렵이 되면 분주했다. 석양빛보다 진한 화장하고 저녁노을을 뒤로했다. 거리에 나가 시베리아 개발과 철도 건설에 고용된 중국인과 러시아 군민(軍民)들을 상대했다. 철도가 만주로 연결되자 가라유키도 철길 따라 만주로 진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군사정보를 수집한 일본 밀정은 회고록에서 이 여성들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광야의 꽃이었다. 몸과 마음은 물론 물질적으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입도 무거웠다. 마적의 처가 된 가라유키도 한둘이 아니었다.”

어린 대륙신부, 훗날 대작가로 명성

때려 부수기 전, 팡정의 일본개척단 기념공원 공묘를 찾은 일본인 참배객. [사진 김명호]

때려 부수기 전, 팡정의 일본개척단 기념공원 공묘를 찾은 일본인 참배객. [사진 김명호]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만주에 일본 여인들이 증가했다. 만주는 한때 음지에서 일하던 일본 남녀들의 신분세탁소였다. 승전국 여인들은 어떨지 호기심 느끼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남만주철도(만철)에 다니는 중국 직원들이 특히 심했다. 일본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건축업과 약재상, 무역업자들도 일본 여자직원을 구하느라 광분했다.

만주에 이민 온 일본 개척단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개척은커녕 비실댔다. 흔히들 둔간병(屯墾病)이라 불렀다. 둔간병은 약이 없었다. 굶어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며 퇴단(退團)을 요구하는 개척단원이 속출했다. 일본 정부와 관동군은 머리를 짜냈다. 청소년의용군의 개척단 파견과 대륙신부(大陸新娘) 정책을 동시에 폈다. 전국적으로 미혼 여성들을 모집했다. 개척여숙(開拓女塾)을 설립해 지원자를 3년간 훈련시켰다. “일본 부녀자의 도덕관을 대륙에 이식해 만주에 신문화(新文化)를 정착시켜야 한다. 야마토(大和) 민족의 순혈(純血)을 보위하는 것이 임무다. 다른 민족과의 통혼(通婚)은 있을 수 없다. 혈액방위부대원 임을 잊지 마라. 결혼하지 않으면 다시는 일본에 돌아올 수 없다.”

만주국 시절, 다롄(大連)항 부두에는 항상 이런 광경이 흔했다. [사진 김명호]

만주국 시절, 다롄(大連)항 부두에는 항상 이런 광경이 흔했다. [사진 김명호]

개척단 소재지는 편벽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선전용으로 꾸민 도시나 철도 연변에 자리한 대형 개척단 외에는 문화생활이 없었다. 라디오 한대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촌구석에 떨어트려 놔도 눈치 있고 머리 좋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16세의 대륙신부가 개척단 단장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부락장과 남편은 모를 것 같아 단장에게 묻습니다. 만주에 와보니 본국에서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남들처럼 둔간병이나 향수병에 걸릴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적(匪賊)이나 마적(馬賊)이라 부르며 멸시하는 집단이 실제로는 중국의 애국 집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적질하는 사람들이 애국자라면 만주인들은 개나 고양이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개조시킨다는 것이 환상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가르침을 고대합니다.” 읽기를 마친 단장은 대담한 어린 신부의 편지를 입에 꾸겨놓고 씹었다. 인기척이 있자 삼켜버렸다. 세상 물정 몰랐던 어린 대륙신부는 훗날 대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죽는 날까지 헤이룽장(黑龍江)성 팡정(方正)의 난민수용소에서 굶어 죽은 단장 얘기만 나오면 통곡했다. “단장이 내 편지를 묵살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단 하루도 단장을 잊은 적이 없다.”

일본이 패망하자 만주국 고관과 관동군 장교 가족들은 일찌감치 일본행 수송선에 올랐다. 죽지 않고 팡정에 집결한 젊은 과부들은 중국인과 가정을 꾸리고, 고아들은 중국인 가정에 입양됐다. 해가 거듭되자 팡정 거리에 중일혼혈아와 중국 양부모 밑에서 성장한 중국 국적 일본 청년들이 득실거렸다. 1972년 중·일 수교 후 중국에 남아있던 일본 이민자와 개척단의 후예들은 거의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중국인이 되었다가 다시 일본인이 된 개척단의 후예들은 중국에 진출하려는 모든 분야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민족 존엄이 돈보다 중요” 공묘 없애

일본 패망 후 팡정의 일본 개척단 난민촌 일경.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팡정의 일본 개척단 난민촌 일경. [사진 김명호]

돈을 번 일본이민과 개척단 후예들의 팡정 방문이 줄을 이었다. 일본개척단의 피해를 많이 입었던 지역임에도 팡정인들은 일본인들을 반겼다. 이유가 있었다. 역사적인 이유로 주민 20여만명 중 반 이상은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현(縣) 정부도 적극적이었다. 일본거리를 조성해 일본기업 40여개를 유치했다. 일본에서 부를 축적해 팡정으로 돌아온 기업인과 가족이 6만8000명에 달했다. 팡정이 작은 일본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2007년 개척단의 후예들이 현 정부에 제의했다. “개척단을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해 묘지와 기념비를 세우고 싶다.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겠다.” 현 정부도 동의했다. 개척단 공묘(公墓)와 백옥과 청석으로 만든 개척단원의 이름까지 새긴 폭 7m, 높이 3.8m의 거창한 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인까지 두다 보니 공원은 항상 정갈했다. 주변에 있는 항일열사들의 무덤은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잡초투성이에 비석에 있는 글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땅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다 보니 소문이 나기까지 4년이 걸렸다.

2011년 다른 지역에서 온 청년 5명이 묘비에 적힌 이름들을 쪼아내고 붉은 페인트를 쏟아부었다. 공묘도 평지로 만들며 일갈했다. “민족의 존엄이 돈보다 중요하다.” 온 나라가 갈채를 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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