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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요리로 거듭난 토종 돼지, 고소한 비계의 유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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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호 25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로메스코 소스에 올린 재래돼지 뒷등심 스테이크. 박종근 기자

로메스코 소스에 올린 재래돼지 뒷등심 스테이크. 박종근 기자

지난 7월 5일 첫 손님을 받은 이래 100일이 넘도록 아직 ‘임시개업’ 중이다. 음식과 와인에 관해 여러 가지 테스트를 계속하면서 정식 개업의 기약은 미뤄지고 있다. 이러다 개업 안 하고 문 닫는 건 아니냐 물었더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웃었다.

동성(同姓)에 동갑내기 두 남성 요리사가 요리 인생의 승부를 건 도전에 나섰다. 이탈리아 음식을 전공한 두 사람이 자신의 대표메뉴를 접고 특수한 재료를 활용한 음식에 와인을 곁들이는 ‘와인 레스토랑’을 이화여대 북문 근처 북아현삼거리에 열었다. 파스타를 주메뉴로 하는 1인 사업장을 운영하다 동업을 시작한 1987년생 최동국·최정형씨다.

식재료는 포항 송학농장 재래돼지 고기다. 2019년 4월 민간농장 최초로 한국종축개량협회 ‘토종’ 인정서를 받은 돼지다. 이 농장은 인정받은 토종돼지를 키우는 유일한 민간농장이기도 하다. 2020년 9월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지역동물다양성 정보시스템(DAD-IS)에 ‘경상북도 재래돼지’라는 이름의 고유 유전자원으로 등재됐다. 국내 30번째 돼지 품종이지만, 민간농장으론 처음이다.

‘임시개업’ 음식·와인 테스트 계속

‘안주가 좋은 와인 바’를 연 동갑 요리사 최동국(왼쪽)·최정형씨. 박종근 기자

‘안주가 좋은 와인 바’를 연 동갑 요리사 최동국(왼쪽)·최정형씨. 박종근 기자

상호는 ‘오늘/파포’다. 두 사람이 각자 운영하던 음식점 이름에서 한 단어씩 따서 조합했다. 정형씨는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5년 4개월 동안 ‘오늘 저녘’이라는 작은 파스타 음식점을 했다. 깔끔하고 예쁜 스타일의 음식으로 그 지역에서는 자리를 잡았었다. ‘저녘’을 두고 오자가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지만 정형씨는 “녘은 무렵, 즈음, 쪽을 의미하는 의존명사”라고 설명했다.

동국씨는 고향인 포항에서 ‘비스트로 파포’를 3년 6개월 동안 운영했다. 많지 않은 자리를 주말에는 서울 손님들이 다 차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문이 났었다. 사전에 없는 영문 PAPO가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파스타 포장마차’의 줄임 말이라 한다.

두 사람 음식은, 스타일은 좀 달랐지만 맛있고 푸짐하다는 평을 들었다. 서울 출신 정형씨는 보기 좋으면서 내용도 실한 음식을, 포항 출신 동국씨는 맛이 진하면서 과감한 레시피를 추구했다.

동국씨는 포항에서 일하면서 송학농장 이한보름(43) 대표와 인연이 닿았다. 이 대표가 재래돼지 고기의 시장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육가공 실험실 에이징 랩(Aging Lab)에서 함께 음식 실험도 하고, 팝업 행사도 했다. 지난 8월에는 KBS 1TV ‘한국인의 밥상’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그 교분으로 이 대표는 재래돼지 고기를 공급하고, 두 요리사는 특수한 고기로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재래돼지 맛을 세상에 알리기로 ‘상생의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오늘/파포’에서는 농장주가 4주일 숙성해 보내는 재래돼지 고기를 활용한 음식을 중심으로 메뉴를 짜고 있다.

임시개업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두 요리사가 전업에 가까울 정도로 환경이 바뀌는 상황에서 새로운 재료로 만드는 음식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 실험을 하기 때문이다.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다. 10월에만 두 차례 찾아가 먹어보면서 이만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사자들은 아직 아니라고 한다.

현재 메뉴는 ▶재래돼지 고기 파테 샐러드 ▶재래돼지 고기로 속을 채운 닭날개구이 ▶재래돼지 삼겹살 구이를 올린 뇨키 등 파스타 4종 ▷재래돼지 뒷등심 스테이크(부위는 계속 바꾸며 테스트 중) ▶페이스트리로 감싸서 구운 재래돼지 미트파이 ▶무항생제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 ▶가자미 버터구이 ▶새우 수플레 등이 있다. 와인은 4만~10만원 사이 30종(레드 16, 화이트 10, 스파클링 4)을 갖췄으나 앞으로 맛, 종류, 가격대를 더 다양하게 늘릴 계획이다.

네 가지 음식을 먹어봤다. 요리마다 곁들인 소스의 진한 맛과 향이 인상적이다.

삼겹살·스지로 만든 파테 샐러드. 박종근 기자

삼겹살·스지로 만든 파테 샐러드. 박종근 기자

▶파테 샐러드: 파테는 일종의 누름고기다. 재래돼지 스지, 삼겹살과 피스타치오(때로는 말린 크랜베리)를 갈고 파이 크러스트 또는 베이컨으로 감싸 오븐에 굽는다. 그걸 식혀서 잘라 계절채소 무침과 마늘잼을 곁들여 내온다. 두 가지 파테가 내용은 같은데 조직감은 다르다. 크러스트로 감싼 것은 내용물 알갱이가 보일 정도로 갈고, 베이컨으로 감싼 파테는 곱게 갈아 햄처럼 만들었다.

삼겹살구이를 올린 뇨키 파스타. 박종근 기자

삼겹살구이를 올린 뇨키 파스타. 박종근 기자

▶뇨키 파스타: 녹진하고 고소한 크림소스를 접시에 깔고, 감자를 갈아 가래떡처럼 빚은 뇨키를 관자 크기로 잘라 삶은 뒤 앞뒤를 구워 담았다. 양송이와 재래돼지 삼겹살 구이를 그 위에 올렸다. 트러플오일을 치고 그라나 파다노 치즈와 통후추를 갈아 뿌렸다. 마늘 향도 은은하게 올라온다. 뇨키는 물컹한 듯 폭신하고, 삼겹살은 쫄깃하면서 고소한 기름기가 물씬하다. 재래돼지 고기는 비계가 많은데, 조직이 치밀해 젤리처럼 존득하고 아삭거리는 질감이 독특하다.

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닭날개구이. 박종근 기자

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닭날개구이. 박종근 기자

▶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닭날개구이: 재래돼지 뒷다리살·삼겹살을 다지고, 볶아서 잘게 썬 팽이버섯·대파·베이컨을 섞어서 닭 날개 뼈를 제거한 빈 자리에 채워 기름 두른 팬에 구웠다. 간장에 와인을 넣어 졸인 소스에 얹고, 당근 샐러드(라페)와 고수를 가니시로 곁들였다. 구운 닭 껍질 향과 재래돼지 고소한 맛이 어울려 풍미가 색다르다.

▶재래돼지 뒷등심 스테이크: 로메스코 소스에 페페론치노 가루를 더해 매콤하고 빨간 소스 위에 소금 간만 해서 팬과 오븐에 굽고 숯불로 마무리한 스테이크를 올렸다. 스테이크 구울 때 나온 기름에 구운 양송이와 초절임한 래디시(빨간 무)를 곁들였다. 마지막으로 바싹 구운 대파·양파 가루를 뿌렸다. 비계와 살의 비율이 비슷한 스테이크 고기는 재래돼지 특유의 향이 있고, 비계는 고소하지만 느끼함은 적다. 식어도 기름이 엉기거나 굳는 현상이 일반 돼지고기보다 덜하다. 소스에는 아몬드·캐슈넛 같은 견과류를 다져 넣어 고소한 쌈장 같은 맛도 난다.

잔이든 병이든 와인 주문 필수

재래돼지 고기는 구이보다 국물음식이 더 맞는 듯해서 수프 같은 메뉴도 개발할 생각이다. 돼지 성장이 워낙 더뎌 고기 원가가 한우만큼 비싸기 때문에 음식값 책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한동안은 마진을 줄이는 방법으로 손님의 구매력과 합일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둘은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2008년 워커힐 호텔 실습생으로 처음 만났다. 이후 각자의 길을 갔으나 서로 1인 매장을 운영하면서 동병상련의 공감을 나누다가 가까워져 동업에 이르렀다. 새로 시작한 곳은 와인이 중심인 업소다. 손님은 잔이든 병이든 테이블마다 와인을 주문해야 한다. 입구에 게시한 메뉴판에 음식 이름보다 큰 글씨로 “주류 필수 매장입니다”라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위치가 의아하다. 일부러 찾지 않고는 접근이 쉽지 않다. 서울 서대문05 마을버스 종점에 있다. 금화터널이 지나가는 금화산 중턱 마을이다. 이런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 번잡하지 않고, 비슷한 업소가 없는 곳을 찾았다.” 시장성보다는 두 사람 성격과 취향이 우선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는 것보다 그들의 음식을 좋아해서 찾아오는 손님을 잘 모시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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