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연주가 강태환, 고기·술 안 먹고 하루 두 끼 ‘도인’ 생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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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국립중앙박물관 불교미술실에서의 강태환. 화가 김형태가 촬영했다. [사진 황인]

국립중앙박물관 불교미술실에서의 강태환. 화가 김형태가 촬영했다. [사진 황인]

강태환은 1944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원래 본향은 충남 서산이다. 부친은 만주에서 큰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해방되자 인천으로 돌아와서 양조장을 차렸다. 부유한 집안이었다. 굶주린 인천의 거지들이 다 강태환의 집으로 찾아왔다. 죽산 조봉암(1899~1959)이 외숙부다. 호방한 부친은 인천의 집에서 손위 처남 조봉암과 함께 술을 자주 마셨다. 조봉암은 술이 세었다. 아무리 마셔도 한 두 시간 자고 나면 생생해졌다.

강태환은 남들보다 한 해 일찍 신흥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 살 어려서 그런지 뭐든지 시원찮았다. 4학년이 되자 밴드부에 들어갔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가 억지로 넣은 것이다. 당시 전국의 국민학교에 밴드부가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수원에, 하나는 인천에 있었다.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강태환은 어릴 때 침을 잘못 맞아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운지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구멍을 정확하게 막아야 하는 클라리넷 연주에는 치명적이었다. 집의 지하실에서 밤낮으로 클라리넷을 불어댔다. 다듬잇방망이에 클라리넷 구멍을 그려놓고 시도 때도 없이 운지를 익혔다. 클라리넷 연주는 적성에 맞아 적극적이었다.

억울한 죽음 죽산 조봉암이 외숙부

공간사랑에서 열리던 강태환 트리오 프리재즈 연주 포스터. [사진 황인]

공간사랑에서 열리던 강태환 트리오 프리재즈 연주 포스터. [사진 황인]

클라리넷 특기생으로 동산중학교를 무시험으로 합격했다. 시험을 쳤으면 들어가기 힘들었을 텐데 공부를 전혀 안 한 강태환이 특기생으로 합격하니 집안에 경사가 났다. 동산중고등학교는 야구부로 유명했다. 운동장이 다른 학교의 2배 정도는 되었다. 소리를 낮추러 멀리 떨어진 운동장 한구석으로 가서 혼자 클라리넷을 불었다. 이 무렵 여의도 공군 군악대를 자주 찾아갔다. 군악대에 고종사촌 형 김대환(1933~2004)이 있었다. 김대환은 세 살 때부터 강태환의 집에서 살았기에 친형제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강태환과 김대환은 색소폰과 드럼에서 명인이 되어 음악적 동지로 활동하게 된다.

서울예고 입시 때다. 강태환은 음악이론이나 음악용어조차 몰랐다. 시험감독은 베이스 바리톤 오현명, 시험관은 KBS교향악단 단원들이었다. 클라리넷 교본에 나온 걸 그냥 불었다. 합격했다. 음악 전공 입학생으로는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당시 서울예고는 이화여고 4층과 지하를 빌어 교사로 사용했다. 서울예고 2학년 때 4·19가 터졌다. 고관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이화여고는 학생들이 데모에 뛰어들지 못하게 교문을 걸어 잠갔다. 2년 전 외숙부 조봉암의 억울한 죽음을 본 강태환이다. 강태환은 담을 넘고 나가 데모대에 합류했다. 4·19가 끝났다.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학교는 체면이 구겨졌다. 강태환이 혼자서 서울예고 체면을 다 세워줬다고 교장은 강태환을 칭찬했다.

서울 시내에는 르네상스 등 음악감상실이 몇 군데 있었다. 여기서 ‘레지널드 켈’이 연주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콘체르토를 처음 들었다. 고교생 강태환은 이렇게도 행복한 톤과 컬러의 클라리넷 소리를 들어 본 게 처음이었다. 음악감상실에 강태환이 나타나면 디제이는 알아서 이 곡을 틀어 주었다. 평생 이 소리를 담고 살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다.

서울예고에서도 학과공부는 뒷전이었다. 독일인 독일어 선생은 강태환이 시험에서 한 문제만 맞히면 70점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플루티스트 고순자 선생은 강태환의 연주에서는 프로의 톤이 나온다고 격려해주었다. 강태환은 학교가 시시해졌다. 결국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이 열여덟에 미8군 악단에 들어갔다.

제50회 재즈 페스티벌 포스터. [사진 황인]

제50회 재즈 페스티벌 포스터. [사진 황인]

곧 호텔의 밴드 멤버가 되었다. 국악이나 클래식 음악과는 달리 재즈의 즉흥연주에서는 카운트를 세는 법이 필수적이다. 이걸 터득하기가 쉽지가 않다. 강태환은 숙대앞 셋집 2층방에서 살고 있었다. 카운트 세는 법을 독학으로 돌파하려는 힘든 점수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돈오의 순간이 찾아왔다. 카운트 세기가 한 순간에 깨쳐졌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뉴코리아호텔 나이트클럽 밴드의 선배들은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카운트 세기를 익힌 강태환에게 마스터를 맡으라 했다. 스무세살의 청년 강태환은 졸지에 밴드 마스터가 되었다. 인기가 좋았다. 곧이어 프린스호텔로 이적했다. A 밴드 6인조를 이끌었다. B 밴드 멤버로는 고종사촌 형인 드러머 김대환, 기타리스트 최이철, 싱어 조용필이 들어왔다. 연주가 좋은 데다 조용필이 노래를 잘 불러 밴드는 인기가 많았다. 화양연화의 시간이 흘러갔다.

다 버리고 자신의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 건축가 김수근이 만든 원서동의 공간사옥에 공간사랑이 들어선 건 1977년이다. 당시 공간사랑에서는 공옥진의 창무극, 사물놀이, 민속 굿제, 신파극 페스티벌, 현대 무용, 마임, 발레, 재즈 등의 공연이 열렸다. 1978년부터 강태환 등 여러 재즈 연주가들이 모여 한달에 한번 공간사랑에서 즉흥연주를 벌였다. 처음에는 30명으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연주자들이 줄어들었다. 결국 강태환, 김대환(드럼), 최선배(트럼펫) 셋만 남았다. 이 셋으로 프리재즈를 하는 강태환 트리오가 결성되었다. 이 셋은 공간사랑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공간사랑은 1986년에 문을 닫았다. 76번째 공연이 이들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1985년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강태환은 해외공연을 자주 가졌다. 양반다리를 하고 방석에 앉아서 하는 그의 연주 방식이 독특하게 보였다. 순환호흡, 빠른 텅잉, 배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력파 강태환은 해외공연을 시작하자마자 곧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독일, 미국, 영국, 호주, 홍콩, 러시아, 리투아니아, 프랑스 등으로 연주가 이어졌다. 1990년, 무세중, 이만방, 김대환, 이불, 심철종, 박창수, 김형태 등 한국작가 15명이 참가하는 일한행위예술제에 특별출연으로 참가했다. 강태환이 명단에 빠진 걸 안 일본측이 강력하게 참가를 요구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강태환의 명성이 높았다. 1990년대 초반은 홍대 앞 문화의 전성기다. 이때 강태환은 홍대 앞의 록카페 곰팡이 등에 나타나 화가 이준영 같은 젊은 아티스트들과 어울려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78년부터 원서동 공간사랑서 공연

1995년 녹음된 음원을 2018년 LP로 발매했다. [사진 황인]

1995년 녹음된 음원을 2018년 LP로 발매했다. [사진 황인]

그의 알토 색소폰은 50년 된 셀마다. 구멍이 난 데가 있으면 가죽으로 메우고 접착제를 발라 굳혀서 쓰고 있다. 2년에 한 번 동대문시장에 가서 가죽을 사다 얇게 갈아서 패드를 교체한다. 교체 후 자리를 잡는 데에 보름 정도 걸린다. 헌 집처럼 며칠만 안 써도 무너질지 모르는 오래된 악기는 그의 몸을 닮았다.

그는 효창공원 부근에 산다. 자택의 지하실에서 매일 여덟시간씩 연습을 한다. 색소폰을 불다 보면 이가 빠지기도 한다. 강태환은 이가 많이 빠졌다. 이가 빠지면 이제까지 잘 구사하던 특별한 연주법이 안 된다. 기술을 다시 습득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더 좋다. 다시 기술을 습득할 즐거움과 기쁨이 생겼으니. 관악기 연주자에게 절정의 육체적 나이는 40대, 50대다. 강태환은 팔순을 바라다보고 있다. 이가 빠지거나 나이가 들면 색소폰 연주자는 센 소리를 못 낸다. 그는 몇 년 전 심장질환으로 스탠트 시술을 했다. 그런데도 강태환의 색소폰 소리는 힘이 여전하다.

강태환은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 고기는 먹지 않는다. 술도 안 마신다. 최소한의 단백질 섭취를 위해 약간의 멸치, 두부는 먹는다. 그래도 몸에 별 이상이 없다. 라면은 김치 없이 먹는다. 라면 자체가 짜기 때문에 김치가 필요 없다. 일본공연을 가면 대개 보름쯤 머무는데 김밥으로 일관한다. 그가 사는 동네에 마니아들이 찾는 유명한 수타 짜장면집이 있다. 그걸 먹어본 강태환은 유명 수타 짜장면이나 짜파게티나 맛이 그게 그거라 했다.

강태환의 생활과 몸과 용모는 안개랑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밋밋하고 해맑은 도인풍이다. 그의 또 다른 몸은 알토 색소폰이다. 이 둘이 합체하는 순간 격렬한 사자후가 터진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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