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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보다 이윤 중시 행태 참을수 없다” SPC 불매운동 확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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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호 05면

제빵공장 사망사고 파장

20일 오후 서울 양재동 SPC그룹 본사 앞에서 SPL 제빵공장 사망사고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렸다. 오유진 기자

20일 오후 서울 양재동 SPC그룹 본사 앞에서 SPL 제빵공장 사망사고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렸다. 오유진 기자

빵은 원래 불평등했다. 유럽의 귀족들은 야들야들한 흰 빵을, 농민들은 거친 흙빛 빵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야 했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은 ‘빵 평등권(The Bread of Equality)’의 외침 속에 일어났다. 230여 년 지난 2022년 한국은 ‘빵’으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 빵은 눈물 젖은 빵이자, 피에 물든 빵이다.

지난 15일 오전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SPC그룹 계열사인 SPL 제빵공장에서 23세 여성 노동자가 사망했다.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소스 교반기를 가동하던 중 기계 안으로 상반신이 들어가는 사고를 당해 숨진 것이다. 2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을 통해 ‘질식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했다. 국민은 SPC가 비인간적인 사후 수습에 나서자 분노하고 있다. 불매운동이 불길처럼 번진다.

행사장에 설치된 추모의 벽에는 ‘빵보다 사람이 먼저’라며 SPC 불매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유진 기자

행사장에 설치된 추모의 벽에는 ‘빵보다 사람이 먼저’라며 SPC 불매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유진 기자

SPL 측은 고용노동부가 안전장치가 없는 7대에만 작업 중지를 명령했다는 이유로 사고 다음 날인 16일 사고현장을 흰 천으로 가린 채 남은 기계 2대의 가동을 곧장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SPC는 사람보다 이윤’이라는 의식이 빵의 효모처럼 불매운동을 증식시키고 있다. 직장인 최윤서(28)씨는 “우리가 습관처럼 먹는 빵·아이스크림을 생산하는 기업이 사람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곳이었다니 충격”이라며 “SNS에서 본 ‘피 묻은 빵을 먹을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아 불매운동에 나섰다”고 말했다. 대학생 임성준(23)씨는 “노동자의 인권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것 같은 기업의 행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라고도 했다. 어릴 때부터 SPC의 삼립빵을 즐겨 먹었다는 곽모(52)씨는 “딸 같은 여성이 처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 고인의 장례식장에 답례품 용도로 기업이 빵을 보냈다는 비상식적인 행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울분을 토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20일 경위 파악을 지시하면서 “참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며 “아무리 법이나 제도나 이윤이나 다 좋지만, 우리가 그래도 같은 사회를 살아나가는데 사업주나 노동자나 서로 상대를 인간적으로 살피는 최소한의 배려는 서로 하면서 우리 사회가 굴러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올해 들어 광주 동구 화정 아이파크 건설현장 붕괴 사고, 삼표 양주 채석장 매몰사고, 여천공단 폭발사고 등 노동현장에서의 사망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오프라인 불매운동까지 번진 건 드문 일이다. SPC 불매운동은 15일 사고 이전에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 3월 28일부터 53일간 임종린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 지회장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사용자 측의 노조 탈퇴 회유, 승진차별 등이 이유였다. 당시 곳곳에서 소규모 SPC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15일의 사망사고는 불매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빵이 사실상 쌀을 잇는 주식으로 떠오르고,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브랜드가 적지 않다는 점은 불매운동의 불씨를 퍼트리는 기폭제가 됐다. 대학생 장태린(25)씨는 “대학생이자 청년 입장에서는 다른 직장 내 사망사고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SPC 사고는 더욱 충격이 컸고, 불매운동으로까지 쉽게 번진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 5월부터 SPC 불매운동에 동참한 대학생 이은정(23)씨도 “집 근처에 파리바게뜨 매장이 3개 있지만, 대체재가 많아 가족과 친구들에게 불매운동 동참 제안을 하기 쉽다”고 말했다.

추모행사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를 준비하고 있다. 오유진 기자

추모행사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를 준비하고 있다. 오유진 기자

SPC 불매운동이 확산하는 가운데,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파리바게뜨를 비롯한 SPC 계열사 가맹점주 127명 등이 제기한 영업방해금지 가처분을 일부 인용했다. 법원은 “밥 좀 먹고 빵 만들자!”, “사지도 먹지도 맙시다”, “눈물로 만든 빵 안 먹어” 등 약 50여개의 문구를 사용해 구호로 외치거나 배포하는 행위, 현수막을 설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SPC가 감내해야 할 몫을 약자인 소상공인이 떠안는 상황을 우려한 판단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도 오프라인 불매운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난 20일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은 ‘전국 동시다발 3차 파리바게뜨 매장 앞 1인 시위’를 열었다. SPC가 사회공헌 차원에서 지은 서울대학교 내 SPC 농생명과학연구동과 허영인 세미나실 앞에도 규탄 대자보가 부착됐다.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측은 “앞에서는 사회 공헌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착취한 SPC 기업 계열사들을 불매하겠다”고 나섰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노사관계 문제를 안고 있고 먹을거리라는 직접적 위협을 더한 SPC에 대해 소비자들은 격해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불매운동 속, 소상공인인 가맹점주들의 피해만 커질 수 있어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학생 김호진(27)씨는 “이번 사고에 책임이 없는 가맹점주에게만 피해를 주는 무분별한 불매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 점주들은 연일 마음을 졸이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서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이모(42)씨는 “아직은 손님 감소가 직접 와닿지는 않지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며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마치 광기 어린 마녀사냥을 보는 듯하다”고 털어놨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지난 20일 고용노동부 경기지청과 경기 평택경찰서는 평택 SPL 본사와 제빵공장 등을 압수수색했다. 지난 4월 SPL 공장에서 발생한 끼임 부상 사고 2건 이후 재발방지대책이 적법하게 수립·이행됐는지 등을 규명한다는 방침이다. 15일 사망사고가 난 공장에서 일주일 전에도 손 끼임 사고가 났다. 하지만 사측에서는 파견직이라는 이유로 병원 이송을 하지 않는 등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SPC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작업에 대한 근무 매뉴얼인 ‘2인 1조’ 작업 관련 부분은 중대재해법 적용을 판가름하는 핵심 쟁점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단순 처벌보다 노동현장 전반의 문화가 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근본적인 문제는 산업계에 팽배해 있는 안전불감증”이라며 “법의 취지에 맞춰 책임자를 일벌백계하는 식의 시그널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 소장은 “노동자를 부품과 다를 바 없는 생산 도구로 이용하고 노동을 이윤 실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이번 사안의 문제”라며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라도 노동자 인권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안에 대해 분노를 하더라도 냉정한 시각으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대재해법의 목적은 산업재해 예방”이라며 “재발방지를 위한 안전시스템 개선이 중요하지, 비난의 대상 찾기식으로 해당 법을 적용하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사망자는 사고 전날인 14일 오후 8시부터 10시간 정도 일하다 근무 교대 2시간 정도를 앞두고 있었다. 이 공장 노동자들은 주 5일, 하루 12시간씩 야간 근무하는 형태로 일한다. 유족은 21일 사고 경위를 명백히 밝혀달라며 법률대리인을 통해 SPL 관계자들을 고용노동부와 경찰에 고소했다.

‘빵 평등권’이 하나의 이유가 된 프랑스혁명 뒤 태어난 ‘평등의 빵’이 바로 바게트다. SPC의 주력 계열사가 프랑스의 심장부와 ‘평등의 빵’을 합친 ‘파리바게뜨’라니, 아이러니다.

허영인 회장 “책임 통감, 3년간 1000억 투자해 안전관리 강화할 것”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뉴시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뉴시스]

15일 평택시의 SPC 계열 SPL 제빵공장 사망사고와 관련해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21일 서울 서초구 SPC그룹 본사에서 “책임을 통감하고 엄중한 질책과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사망사고 6일 만에 카메라 앞에 선 허 회장은 총 일곱 번 고개를 숙이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는 “고인과 유가족께 깊은 애도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회사는 관계 당국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있으며, 정확한 사고 원인 파악과 후속 조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고 다음 날 사고 장소 인근에서 작업이 계속 진행된 점도 거듭 사과했다. 허 회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모두 제가 부족한 탓이며, 평소 직원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제 불찰”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 회장은 “3년간 총 1000억원을 투자해 그룹 전반의 안전경영 시스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전사적인 안전진단을 시행하고, ‘안전경영위원회’를 설치해 안전관리를 강화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허 회장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안전관리 강화는 물론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의 문화를 정착시켜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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