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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미국 독립은 노예제 지키기 위해서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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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미국 건국에 대한 새로운 시선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제럴드 혼은 『1776 반동혁명: 노예 저항과 아메리카합중국의 기원』(2014)에서 미국 독립전쟁이 하나의 ‘반동혁명(counter-revolution)’이었다고 규정한다.

혼은 인종차별 극복에 사명감을 갖고 수많은 저작을 발표해온 역사학자다. 그 열성이 편향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타파하고자 하는 종래 역사서술의 편향성에 비교한다면 장래 역사서술의 방향을 찾는 데 훌륭한 공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노예제 철폐 움직임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노예제에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었고, 독립전쟁에 이르는 본국과의 갈등에 노예제를 둘러싼 요인이 많았다. 노예제의 지속이 미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기였다고 보는 혼의 관점에는 수긍할 만한 측면이 크다.

19세기 후반 유럽 “노예제 없애야”
영국-아메리카 식민지 갈등 격화

초기 미국, 노예경제에 크게 의존
16~19세기 1200만 흑인들 잡혀가

남·북 갈등 커지며 전쟁으로 파국
“미국사는 흑인의 역사” 공감 늘어

뉴욕타임스 ‘1619 프로젝트’ 특집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문. J S 스미스&Co의 1890년 10월 인쇄본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문. J S 스미스&Co의 1890년 10월 인쇄본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뉴욕타임스 매거진’ 2019년 8월호에 ‘1619 프로젝트’가 대형 특집으로 실렸다. 미국 역사에서 흑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밝히자는 취지다. 버지니아 식민지에 첫 흑인 노예가 도착한 400주년에 맞춰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주류 역사학계에서 “위험한 수정주의”란 비판도 받았으나 이듬해 퓰리처상(비평 부문)을 받으며 그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2020년 가을 캘리포니아주에서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교육과정에 반영할 움직임을 보이자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반대 담론을 일으키기 위해 ‘1776 위원회’라는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이 위원회는 2021년 1월 18일 첫 보고서를 내고 이틀 후 해산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당일 가장 먼저 취한 조치의 하나였다.

미국 남부가 연방에 재가입하지 않으면 남부 경제의 근간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링컨의 경고를 담은 만평.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남부가 연방에 재가입하지 않으면 남부 경제의 근간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링컨의 경고를 담은 만평. [사진 위키피디아]

애초의 특집 내용에는 약간의 ‘오버’가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큰 오버가 특집의 작은 오버를 덮어준 셈이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에 나선 주된 동기가 노예제의 존속에 있었다”는 단정적 서술은 애초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많은 식민지의 상당히 중요한 동기가 노예제의 존속에 있었다”는 정도 취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독립 당시에도 북부에는 노예제 폐지 분위기가 강했으나 남부와의 연대를 위해 노예제 언급을 피했다. 헌법 조문에도 각 주의 하원의원 정원과 조세 할당의 기준으로 인구를 산정하기 위해 “정해진 기간 노동 의무를 가지는 자를 포함한 모든 자유인의 숫자에 조세 대상이 아닌 인디언은 넣지 않고 그 밖의 모든 사람 숫자의 5분의 3을 더한다”는 대목에 ‘노예’란 말을 굳이 피한 사실이 보인다. 북부의 몇 주는 독립 직후 노예제를 폐지했다.

1619년 미국 버지니아주에 처음 도착한 노예들의 모습을 그린 1901년의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1619년 미국 버지니아주에 처음 도착한 노예들의 모습을 그린 1901년의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독립전쟁 자체를 반동혁명으로 보는 혼의 관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상공업 방면에서 본국과 경쟁하는 북부가 노예제 플랜테이션에 의존하는 남부와 결탁한 것이었고, 그 결탁이 파국에 이른 결과가 남북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예제가 미국의 진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노예의 다양한 모습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석판화. 영국 정부의 과세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사건은 이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석판화. 영국 정부의 과세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사건은 이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근대 이전 예속적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노예(slave)’와 ‘농노(serf)’가 많이 쓰인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누군가가 주목받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노예와 농노의 차이를 정확하게 가리키는 표현이다. 노예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존재다.

초기 농업사회에서 하층민은 땅에 충성하는 존재였다. 주어진 땅을 경작하는 것밖에 살길이 없었으니 농민과 농노의 경계가 애매했다. 왕이 귀족에게 영지를 하사하면 농민은 그 땅에 묻어서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사하는 영지의 크기를 농민의 호수(戶數)로 표시하기도 했다.

권력자들에게는 땅에 매인 농민 외에 사람에 충성하는 일꾼들도 필요했다. 가사노동과 수공업이 필요하고 권력이 커지면 행정업무와 무력(武力)이 필요하게 된다. 장거리 교역의 발전에도 권력자를 위해 외지의 물자를 구해주는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이런 일을 맡는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받았고, 실제로 노예가 흔히 활용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 남부(Confederacy)와 북부(Union). 자유주(청색)와 노예주(적색) 사이의 옅은 색깔 5개주는 노예주면서 북부에 참여했다. 전쟁의 이유는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노예주의 서쪽으로의 확장 문제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남북전쟁 당시 미국 남부(Confederacy)와 북부(Union). 자유주(청색)와 노예주(적색) 사이의 옅은 색깔 5개주는 노예주면서 북부에 참여했다. 전쟁의 이유는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노예주의 서쪽으로의 확장 문제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노예가 권력자에 가까운 위치 때문에 평민보다 우월한 조건을 누린 일도 많았다. 이집트에서는 노예집단 맘루크(Mamluk)가 정권을 장기간 장악한 일도 있었고, 오스만제국의 친위대 예니체리(Janissary)도 특권적 신분을 누렸다. 청나라에서 만주족 관료들이 황제에 대해 ‘노재(奴才)’를 자칭한 것도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은 ‘노예’라면 『엉클 톰스 캐빈』의 미국 남부 목화밭을 쉽게 떠올린다. 역사상 노예의 실제 모습은 훨씬 더 다양한 것이었다. 16~19세기의 아메리카 노예는 근대 세계사의 전개에서 특이한 역할을 맡았다.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노예집단의 실제 모습을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죽음만이 출구였던 미국의 노예

『엉클 톰스 캐빈』 초판(1852) 1권 표지에 그려져 있는 흑인 노예의 생활상. [사진 위키피디아]

『엉클 톰스 캐빈』 초판(1852) 1권 표지에 그려져 있는 흑인 노예의 생활상. [사진 위키피디아]

지중해 연안의 선진지역으로 배후지역의 노예를 공급하는 노예시장의 거대한 틀이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예 공급을 그만둔 지역들도 있었으나 1000년 넘게 노예 공급원으로 남아있던 곳들도 있었다. 동유럽과 서아프리카가 그런 예다.

서아프리카는 8세기 이후 이슬람 문명의 경계지역이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세력들이 주변 주민을 포획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수출하는 노예시장이 활발했다. 15세기 중엽부터 유럽인도 기존 노예시장에 끼어들기 시작하다가 16세기 들어 아메리카의 노동력 수요 발생에 따라 노예시장을 더 크게 키워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큰손이 되었다.

16~19세기에 걸쳐 약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 노예가 아메리카로 수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은 지중해 연안으로 팔려간 노예들과도 달리 고향과 완전히 단절된, ‘뿌리’ 뽑힌 존재가 되었다.

뿌리를 잃은 노예에게도 좁으나마 ‘출구’가 있었다. 유럽인 중에는 노예를 기독교에 입교시켰다가 일정 기간 후 해방시키는 관습도 있었다. 노예들이 도망해 무리를 짓고 오지에서 살길을 찾기도 했다. ‘마룬(Maroon)’이라 불리는 탈주노예 집단이 커지자 식민당국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더 이상의 탈주를 막도록 협정을 맺기도 했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노예에게 주어진 출구가 가장 좁은 곳이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고, 노예의 자식은 자동으로 노예가 되었다. 그 지역 노예에게는 죽음만이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노예 신분 때문에 참혹한 삶을 산 사례는 역사의 구석구석에 있었지만, 수백만 인구집단이 수백 년에 걸쳐 이렇게 묶여 지낸 일은 따로 없었다.

영국의 7년전쟁 승리는 껍데기뿐

영국령 아메리카 노예들의 억압이 특히 심했던 첫 번째 까닭은 주민들의 불안감에 있었다. 북쪽의 프랑스령 퀘벡과 남쪽의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노예들에게는 훨씬 넓은 출구가 주어져 있었다. 퀘벡과 플로리다로의 노예 탈주는 일상적 걱정거리였고, 노예들이 적대세력에 호응하는 것은 최악의 공포였다.

노예 인구의 급속한 팽창이 노예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영국령 아메리카는 노예 인구 증가가 가장 빠른 지역이었다. 통제력 한계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노예제 운영도 공포심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7년전쟁(1756~1763)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따돌렸다. 북아메리카에서는 퀘벡과 플로리다를 탈취하여 오랜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국의 승리가 껍데기뿐이었다. 퀘벡과 플로리다의 위협이 사라지자 식민지 주민들이 오히려 프랑스·스페인과 손을 잡고 본국을 등지고 나선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인지(印紙) 조례(Stamp Act, 1765)를 둘러싼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본국 입장에서는 식민지의 안보 비용을 주민들도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이 조세 없다”는 명분으로 저항했다.

1772년의 서머셋 사건(Somerset’s Case)이 독립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보스턴에서 노예로 구입되어 자메이카로 옮겨지던 중의 한 아프리카인이 영국 땅에서 탈주했다가 붙잡혔을 때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법원에 그 석방을 요청한 사건이다.

제임스 서머셋의 석방 판결은 식민지의 노예제와 무관한 것인데도 노예제 폐지론이 자라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식민지에서 큰 경각심을 일으켰다. 4년 후의 독립선언에 이 판결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사람들은 미국 독립을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반동혁명’으로 본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