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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근로자 손끝이 만든 조선 1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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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지영 기자 중앙일보
최지영 경제에디터

최지영 경제에디터

지난달 말 찾은 전남 영암의 숙소에선 현대삼호중공업의 도크가 훤히 보였다. 도크는 LNG선 건조 작업으로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1년 전 돌아봤을 땐 텅 비었던 인근 대불산단 협력업체 공장에도 조립 중인 LNG선 모듈(선박의 일부인 대형 부품)들이 가득했다.

한국 조선에 온기가 돌아왔다. 실적까지 회복하려면 최소 1~2년은 더 걸리겠지만, 수주만큼은 호시절 때가 부럽지 않다. 글로벌 전문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올해 1~9월 수주에서 한국은 1322만GCT(239척·44%)로 중국의 1327만GCT(524척·44%)를 바짝 뒤쫓고 있다. 9월 실적만 따져보면 한국이 중국의 2배 차이로 1위다. 선박 가격도 거의 한창 때 수준으로 회복했다.

조선업은 극단적인 사이클 비즈니스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 번’ 돈으로 차가운 불황을 버텨내야 한다. 한번 배를 수주하면 인도할 때까지 2~3년은 걸리고, 경기 사이클의 제일 끝단에서 이를 가장 심하게 겪기 때문에 침체가 유난히 혹독하다. 2000년대초 초호황을 누렸던 한국 조선업은 불행하게도 못 나갈 때를 대비하지 못했다. 2015년부터 시작된 극심한 불황에 초토화됐다.

수주 호황에도 실적개선은 몇년 뒤
조선업 부활, 좋은 일터 부활 돼야
정부 대책으로 급한 불은 껐다지만
장기 숙련공 확보 지원대책 미흡

대우조선해양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에 설치된 대형 크레인. 지난 6~7월엔 협력업체 도크 점거 사태도 겪었다. 산업은행의 21년 관리 끝에 최근 한화그룹으로의 매각이 결정됐다. [연합뉴스]

대우조선해양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에 설치된 대형 크레인. 지난 6~7월엔 협력업체 도크 점거 사태도 겪었다. 산업은행의 21년 관리 끝에 최근 한화그룹으로의 매각이 결정됐다. [연합뉴스]

조선업을 살리려고 정부는 2016년 이후에만 대우조선해양 등에 5000억원 이상을 쏟아부었다. 한국 경제에 조선업은 왜 이토록 소중한 걸까. 지난해 기준 전체 수출에서 3.6%를 차지한다는 수치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배터리·반도체·자동차·전자 등의 공장이 각종 인센티브 등으로 해외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선은 한국에 대대적인 일자리를 유지하면서 수출을 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대형 제조업이다.

설계나 엔지니어링 특허 대부분을 유럽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세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납기를 지키는 깔끔함,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기상천외한 공정 기술이다. 이는 결국 근로자의 매서운 손끝에서 나왔다. 주어진 기간 안에 엄청나게 난이도 높은 용접·그라인딩·도장 등을 척척 해내는 근로자들이 없었으면 조선 1등은 없었다.

조선은 한국이 가진 기술 우위를 앞으로도 몇 년간 지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업종이기도 하다. 한국 조선업은 지난 몇 년간 중국의 저가 공세에 휘청했지만, 해양환경 규제 강화로 요즘 대세가 되고 있는 친환경 선박에선 압도적인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불황 때 곪아버린 한국 조선업의 실상은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 노조의 도크 점거 사태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용접·도장 일을 하는 건설업체 일용직은 시간당 2만5000원을 넘게 벌지만, 같은 업무지만 훨씬 난이도가 있는 선박 건조 일을 하면 시간당 1만3000원이 고작이다. 협력업체 보수는 이보다도 적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 남보다 적게 번다면 도대체 누가 그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오랜 기간 부실 기업으로 산업은행 감독 하에 있었던 대우조선의 특수 상황이 있겠지만, 다른 조선업체도 이런 상황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렇다 보니 2014년 20만명이 넘던 조선업 종사자는 9만여명으로 줄었다(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여기에 조선업의 비정규직·하청 비중은 올해 기준 무려 62.3%에 달한다. 전체 산업 통틀어 가장 높다. 다른 산업 전체 평균은 17.9%에 그친다.

정부가 지난 19일 대대적인 조선업 지원책을 발표했다. 당장 급한 불은 껐다. 특별연장근로 연간 활용 기간을 90일에서 180일까지 한시적으로 확대했다. 외국인 숙련 근로자도 조선업에 먼저 배정하고 쿼터도 따로 만든다고 한다.

아쉬움도 많다. 조선업에 몸담았다가 혹독한 삶을 견디다 못해 건설현장 등으로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오는 유인책이 여전히 부족하다. 이들은 지금의 한국 조선 1등의 신화를 만들어 낸 숙련 일꾼이다. 조선업 살리기의 핵심은 조선업을 일하고 싶은 일터로 다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젊은 인력을 조선업에 수혈하는 대책도 미흡해보인다. 한달에 60만원씩 주는 채용 지원금을 2개월 대신 6개월로 늘린다고 젊은이들이 힘들고, 어려운 선박 건조 현장을 찾을 지는 의문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산업통상자원부가 기획재정부에 요청한 조선업계 인력양성 사업 예산 200억원 중 60억원만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

한국 조선업이 강한 이유는 숙련된 근로자 덕이다. 업의 본질은 그 업의 경쟁력을 잘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