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찍던 ‘신의 숲’ 33년 만에 빗장 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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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지난 15일 찾은 원주 신림면 성황림. 치악산 성황신을 모신 당숲으로 30여 년 일반인 출입을 막아오다, 올가을 한시 개방에 들어갔다.

지난 15일 찾은 원주 신림면 성황림. 치악산 성황신을 모신 당숲으로 30여 년 일반인 출입을 막아오다, 올가을 한시 개방에 들어갔다.

강원도 치악산(1288m) 남쪽 자락에 기묘한 이름의 고을이 있다. ‘신의 뜰’ ‘산신령 사는 숲’이라는 뜻의 원주시 신림(神林)면이다. 이 땅에 치악산의 수호신을 섬기는 성황림이 자리하고 있어 신림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예부터 신림면 성남2리 주민은 마을 어귀 고목을 서낭신(성황신)으로 여겨 그 옆에 서낭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왔다.

원주 성황림(城隍林)은 30년 넘게 일반인 출입이 막고 있는 유서 깊은 성소다. 1년 중 제사를 지내는 단 이틀만 빗장을 풀었던 이곳이 올가을 살포시 문을 열었다. 10월 15일부터 11월 26일까지 토요일마다 체험 행사를 연다는 소식에 냉큼 달려갔다.

훼손 막기 위해 사람 발길 차단

서낭당 앞은 과거 버스가 오간 길이었지만 현재는 원시림의 모습을 회복했다.

서낭당 앞은 과거 버스가 오간 길이었지만 현재는 원시림의 모습을 회복했다.

5만6231㎡(약 1만7000평). 신성의 영역이라지만 성황림은 의외로 작다. 긴 세월 부침이 많았다. 해방 전후로는 먹고살 것이 막막해 화전(火田)을 일삼았고, 버스가 드나들기 쉽도록 숲 한가운데 서낭당 앞까지 큰길을 냈다. 1970년대에는 소위 ‘영발’ ‘기도발’ 잘 받는 장소로 소문이 퍼져 밤낮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하늘이 노했는지 수해가 잇따라 숲 곳곳이 파헤쳐졌다. “몰래 서낭당 안쪽으로 넘어와 내림굿을 벌이는 무당도 많았고, 예비군 훈련도 하고 난리가 아니었다”고 마을 한 어르신이 귀띔했다.

지금처럼 숲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사람의 출입을 아예 막아버린 건 1989년의 일이다. 1933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31만㎡가 넘던 숲이 이미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후였지만, 더 이상의 훼손은 막아야 했다. 울타리를 친 지 어언 30년. 사람이 발길을 끊자 숲이 깨어났다. 흙먼지 날리던 시골길이 지금은 원시림에 가까운 울창한 숲으로 되살아났다.

성남2리 주민 90여 명은 여전히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음력 4월 7일과 9월 9일이 오면 손수 돼지를 잡고, 옥수수로 술을 빚고, 명태를 꽂은 시루떡 따위를 제물로 마련한다. 성황제를 올리는 날이자, 숲이 공식적으로 문을 여는 유일한 날이다.

내달 26일까지 토요일만 체험행사

체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나뭇잎 왕관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나뭇잎 왕관 만들기.

이제 숲으로 들어간다. 범상치 않은 장소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입구에는 금줄이 널려 있고 곳곳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숲은 예상 밖으로 깊어, 오전 10시가 지나서도 좀처럼 해가 들지 않았다. 이 음산한 분위기 덕분에 과거 TV 시리즈 ‘전설의 고향’도 찍었고, 영화 ‘전우치’에도 나왔었단다.

성황림에는 느릅나무·졸참나무·소나무 등 60여 종의 목본식물과 복수초·천남성을 비롯한 100여 종의 초본식물이 자라고 있다. 목익상(66) 문화관광해설사는 “숲이 깊은 만큼 토속 신앙, 역사, 생태 등을 전방위로 체험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숲 한가운데 서낭당이 있었다. 그 옆에 홀로 선 전나무는 숲 유일의 침엽수로, 당집을 세우기 전부터 신목(神木)으로 모신 나무라고 했다. 대충 봐도 둘레 4m 높이가 30m가 넘는 것이 영험한 기운이 대단했다. 누구의 흔적인지, 서낭당을 둘러싼 금줄에는 재운과 건강을 바라는 글을 적은 흰 종이가 중간중간 끼워져 있었다.

올가을 성남2리는 11월 26일까지 매주 토요일 숲 체험 행사를 연다. 마을 체험관을 통해 하루 200명까지 예약자를 받는다. 교육 목적의 단체에게 간간이 숲을 열긴 했으나, 일반인에 정식 개방하는 것은 30여 년 만의 일이다. 프로그램은 간단하다. 숲에서 명상하고, 소원지를 작성해 서낭당 주변 금줄에 꽂는가 하면 천연 염색 따위를 체험한다(1인 1만2000원부터). 성황림 단풍은 10월 말 절정을 이룰 예정이다. 민억기(61) 성남2리 이장은 “마을 대대로 섬겨 온 숲”이라며 “액운은 덜고 좋은 기운만 가져가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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