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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츠랩]"AAA급, 5.9% 이자에도 안팔린다"...회사채 '돈맥 경화'

중앙일보

입력

국가신용등급과 동급인 최우량 등급(AAA) 채권도 최근 투자자를 찾지 못해 유찰되고 있다. 셔터스톡

국가신용등급과 동급인 최우량 등급(AAA) 채권도 최근 투자자를 찾지 못해 유찰되고 있다. 셔터스톡

지난 17일 최고 신용등급(AAA)인 한국전력공사는 연 5.75%와 연 5.9% 금리를 제시하고 총 4000억원 규모의 채권(2~3년물)을 발행하려 했다. 하지만 1200억원 어치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유찰됐다. 막대한 적자와 에너지 원가 상승으로 자금 조달이 급한 한전은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AA-급 회사채보다 더 많은 이자 지급을 약속했지만, 지난달부터 유찰이 잦아지는 등 투자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같은 신용등급(AAA)을 보유한 한국도로공사 역시 17일 1000억원 규모의 채권(2년물) 발행을 시도했으나 아예 투자자를 찾지 못해 전액 유찰됐다.

과천도시공사도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AA 등급의 우량 공기업이지만, 19일 6.2% 금리에 발행하려던 600억원어치 채권이 전액 유찰됐다. 불과 6일전 제시한 금리(5.421%)보다 0.75%포인트이상 높은 금리를 제시했지만, 채권 시장 분위기는 싸늘했다는 전언이다.

“레고랜드 사태 후 회사채 투자 심리 냉각”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하는 회사채 시장이 이달 들어 본격적인 신용 경색 국면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 초부터 시작한 미국의 통화 긴축으로 시장 금리가 계속해서 오르는 가운데, 이달 초 발생한 강원도 레고랜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 여파가 시장 심리를 급격히 얼어붙게 했다.

한광열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이슈로 ABCP 리스크가 커졌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비중이 큰 일부 금융기관에 대한 우려도 커졌기 때문에 채권 투자 심리가 크게 움츠러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AAA급 최우량 채권도 안 팔려 

한국전력과 도로공사 같은 공기업은 원화 표시 채권에선 정부의 신용도와 동일한 최고 등급을 받고 있다. AAA급 공사채 유찰은 채권 시장에선 흔히 보기 힘든 현상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AAA급 한전채 유찰이 잦아지고 있는 것은, 채권 시장 내 자금 경색이 심화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설명했다.

신용도 더 좋은데 이자 더 많이 줘 '금리 전복' 

기이한 것은 신용등급이 더 높은 채권이 더 많은 이자 수익을 제시하는 ‘금리 전복’ 현상이다.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은 투자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AAA급 한국전력 채권(3년물) 금리는 지난달 28일부터 AA-급 회사채(3년물) 금리를 추월했다. 이런 상황은 이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고깃값에 비유하면 1++(투플러스) 등급 한우 가격이 1+(원플러스) 등급보다 싸진 상황으로 비견된다. 이런 상황에선 1++ 등급 고기에만 소비자가 몰리는 것처럼, 회사채 시장도 최우량 등급 쏠림 현상이 심화한다. 이날 한국은행은 올해 1~9월 중 AAA등급 채권의 순발행은 48조원으로 전체 순발행액의 96%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채권 매니저는 “한전채가 다른 회사채 투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상황이지만, 이 마저도 유찰될 정도로 시장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전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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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채 경색→은행 대출 증가의 악순환

기업은 회사채를 활용한 자금 조달 길이 막히면 만기 1년 이내의 단기 자금이나 은행 대출에 의존하게 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초부터 19일까지 회사채 순발행액은 전월 대비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회사채 발행이 막힌 탓에 기존 회사채를 갚은 돈이 새롭게 발행한 돈보다 이 기간 2조5277억원 많았다. 기업의 은행 대출 의존도가 커지면 은행은 대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채를 발행하게 된다. 이렇게 발행한 AA+ 이상 우량 등급 은행채가 채권시장에 풀리면 또 다시 회사채로 자금이 들어오지 않는 '구축 효과'가 발생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약한 고리 여전채부터 타격 

회사채 시장에서 신용 경색이 일어나면 신용도가 가장 약한 부문부터 타격을 받는다. 당장 충격이 온 곳은 카드·캐피털사 등 여신전문금융업계다. 올해 들어 여전사 등 기타 금융채(AA-, 3년물)와 국고채(3년물) 간 신용 스프레드는 회사채(AA- 3년물) 신용 스프레드와 비교할 때 급격히 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14일 여전채 신용 스프레드는 1.71%포인트로 금융위기를 겪던 2009년 9월 4일(1.72%포인트)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투자 위험이 커질수록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자금 조달이 가능한 만큼 시장이 바라보는 여전채 투자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의미다.

캐피털 업계는 전체 자산 중 PF 대출과 저신용 고객 대상 대출채권 비중이 커 금리 인상 국면에 특히 취약하다. 그 중에서도 중소형 캐피탈사들은 조달 금리 상승으로 영업을 할수록 역(逆) 마진 가능성이 커지다 보니 신용대출·자동차할부금융 영업 등을 중단한 곳도 속출하고 있다. AA-급 롯데캐피탈 채권은 지난 18일 3개 채권평가사 평균 금리(민평금리)보다 2%포인트 높은 7.36% 금리를 제시하고서야 100억원 어치 거래가 성사됐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채안 펀드 규모 확대 등 지원 필요”목소리 

회사채 시장이 이상 징후를 보이자 정부도 시장 개입을 본격화했다. 금융위원회는 이날 1조6000억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화펀드(채안펀드)’ 투입에 나섰다. 채안펀드는 정책자금으로 회사채를 사들여 기업의 자금 조달을 지원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증권가에선 좀 더 적극적인 지원책도 제시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은기 삼성증권 수석 연구원은 “시장은 빠른 회사채 시장 안정을 위해 채안펀드 규모를 늘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유동성 어려움에 처한 중소형 증권사를 지원해 단기자금 시장 불안을 잠재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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