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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여사와 질 바이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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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EYE팀 기자

김경희 EYE팀 기자

지난 6월 17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사우스론의 헬기 탑승장 앞. 매 주말 자택이 있는 델라웨어를 찾는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전용 헬기를 타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미국판 ‘도어스테핑’ 장소인 이곳에서 기자들은 여느 때처럼 바이든 대통령에게 국정현안에 관한 질문을 쏟아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국제 유가 상승과 관련한 다소 골치 아픈 질문에도 바이든은 성심성의껏 답하려 애썼다. 11월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정 지지율이 떨어진 상황에서 언론을 통해 민심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장면은 그다음이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질 바이든 여사가 다가오더니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제 갈 시간이 됐어요(We got to go)”라고 말했다. 이후 서둘러 답변을 마무리한 남편을 데리고 헬기로 향하며 언론에 양해를 구하는 여유를 보였다. 몇몇 기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별다른 후폭풍은 없었다. 오히려 미 언론에서는 “남편이 적당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제대로 내조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 6월 17일(현지시간) 기자 질문에 답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는 질 바이든 여사. [AFP=연합뉴스]

지난 6월 17일(현지시간) 기자 질문에 답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는 질 바이든 여사. [AFP=연합뉴스]

미국에서 질 바이든 여사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미 언론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질 바이든이라거나, 그녀가 유치원 무료, 여성들의 직장 복귀 지원 등 바이든의 간판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한다. 영어 교사 출신으로 미국 최초의 ‘워킹(working) 퍼스트레이디’라는 점도 인기 요인이다.

질 바이든과 김건희 여사를 비교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들과 문답을 주고받는데 김건희 여사가 끼어드는 장면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최초의 직장인 퍼스트레이디’라는 타이틀은 말 많던 코바나컨텐츠 폐업과 함께 무색해졌고, 논문 표절, 허위 경력 기재, 주가 조작 연루 의혹 등 털어야 할 먼지는 여전히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4년 넘게 남은 대통령 임기 내내 남몰래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 봉사만 하는 영부인을 보고 싶진 않아서다. 대통령 배우자에게 부여된 법적 지위나 책임 같은 건 없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과 기대라는 게 있다.

해외에 나가 한복만 입어도 뜨거운 관심을 받을 만큼 늘 화제가 되는 건 어쩌면 역대 영부인과 다른 김 여사의 강점일 수도 있다. 기후변화, 동물학대 등 기존에 관심을 보이던 이슈에 깊이를 더한다면 나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부디 지나친 욕심은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