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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준이 고발한다

친일·종북 삿대질 무한반복…요란한 싸움 뒤의 아이러니

중앙일보

입력

김영준 국방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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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보수단체의 광화문 집회에 등장한 성조기. 오른쪽은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 '친일' 딱지를 붙이는 학생들의 퍼포먼스. 그래픽=차준홍 기자

지난 9일 보수단체의 광화문 집회에 등장한 성조기. 오른쪽은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 '친일' 딱지를 붙이는 학생들의 퍼포먼스. 그래픽=차준홍 기자

최근 발간된 미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서는 '탈냉전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아울러 미·중 경쟁 시대로 진입했다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한 과거의 냉전과도 다른 양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우드로 윌슨이 창안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완성한 탈식민지·탈제국주의 질서)가 새 국면을 맞았다는 얘기다. 지금 한반도는 기존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붕괴를 우려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 연대, 그리고 중국·러시아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통치체제 우호 세력의 사이에 놓였다.

16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이 대회를 통해 그의 3연임 집권이 확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합뉴스

16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이 대회를 통해 그의 3연임 집권이 확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합뉴스

한반도는 강대국 간 경쟁이 치열해지거나 국제사회의 신구 권력이 교체할 때마다 늘 격랑의 최전선이 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 말 러·일 전쟁, 광복 후 맞은 6·25전쟁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증대될 때마다 우리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미·소 냉전 이후 지금 다시 한번 전쟁 분위기가 한반도 주변을 몰아치고 있다. 이처럼 시시각각 급변하는 환경 속에 놓이다 보니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을 두고 다양한 목소리와 해법이 나온다. 논쟁이 정쟁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런 과정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논쟁이 담론 수준을 넘어 국론 분열과 정치 세력의 투쟁으로 확장하는 건 국가적 문제다. 외교·안보·국방과 관련한 소모적 싸움과 국론 분열은 정치권을 비롯한 각 사회 분야가 민생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친일·종북 논쟁은 고비용·저효율 갈등을 유발하는 대표적 사례다.

미국이나 유럽 등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유학했거나 주재원 생활을 하다 온 사람들은 한국의 주요 선거에서 나타나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금이나 복지, 경제 정책 등의 내 삶과 직결되는 민생 분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민이나 동성혼, 임신 중절, 성 소수자 권리, 인종차별 같은 이념적 성향과 밀접한 사회·문화 분야 이슈도 아닌 대북 정책이나 한국 현대사 해석 문제에 크게 좌우되는 걸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라서 그렇다.

미국과 서유럽 선거에서는 외교·안보·국방 정책이 웬만해선 주요 이슈가 되지 못한다. 어느 국가나 적대국에 대한 강경책 대 유화책으로 나뉘어 진보와 보수가 서로 정치적 공격을 하는 건 똑같지만, 그게 유권자 표심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만 해도 9·11 사태나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등 특수 사건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지만 역시 선거에서만큼은 유권자의 주된 관심사는 세금, 복지, 동성 결혼, 이민 등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독일의 기민당과 사민당은 러시아나 중국에 대한 안보 정책 면에서 선거판을 뒤흔들만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쉬운 예를 들자면, 현재 미국 정치권 내에 친중파는 없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중국에 대한 시각은 비슷하고, 방법론의 디테일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은 독특하다. 적이면서 동시에 통일의 대상인 북한에 대한 정책이 친일파 청산이나 이승만·김구의 정통성 문제 등 한국 현대사 해석과 결부되면서 정치 투쟁의 수단이 되는 현상이 70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친일·친(종)북 논쟁의 무한 반복이다.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지난 8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뉴시스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지난 8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뉴시스

싸움은 요란하지만 막상 안보 정책을 뜯어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김대중 정부 이래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동시에 한미 동맹과 자주국방을 강조해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대북 정책으로만 보면 과연 보수가 맞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번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 역시 과거 진보 정부보다 더 파격적인 제안이 포함돼 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때 추진했던 한미 동맹(이라크 파병, 한미 FTA, 한미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과 국방비 예산 증대 등은 거꾸로 진보 정부라고 구별 짓기 어려운 정책들이다. 핵심 외교·안보·국방 정책은 어느 진영에서 집권하든 내용 상으로 대동소이했다.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한 자극적인 구호들이 난무했지만 실제 정책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는 의미다.

앞으로도 진보나 보수 어느 쪽이 집권하든 한미 동맹과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물론 디테일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큰 줄기가 바뀔 수는 없다. 그러니 소모적인 친일·종북 논쟁을 접고 우리도 이제 세금, 복지, 교육, 이민, 사회·문화 이슈들로 지지층을 확보하는, 국민의 일상과 관련된 정책으로 선거 승리를 꾀하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미국 중간선거나 대선은 중국 관련 정책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논쟁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일자리, 이민, 인종 갈등, 총기 제한, 임신 중절, 동성 결혼, 교육 문제 등이 결정한다. 유럽 선거도 러시아 정책이 좌우하지 않는다. 에너지 가격 인상, 이민 문제, 기후 변화 정책 등이 결정한다. 미국과 서유럽에선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당파를 초월한 합의가 존재하고. 그 틀 안에서 정치 지도자들과 전문가들의 조용하고 진지한 논의가 이뤄진다.

한반도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나라가 아니다. 여러 유럽 국가 역시 우리처럼 주요 강대국의 팽창 정책으로 희생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억제력 확보와 대화 정책은 두 개의 트랙으로 계속되어야 하고, 한미 동맹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정부도 자주국방에 대한 국민적 염원을 외면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외교·안보·국방 문제를 정쟁의 장으로 끌어들여 친일이냐, 종북이냐 하는 싸움을 유발하는 건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비극이다.

2018년 7월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한 여야 5당 원내대표 등 국회의원들이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뛰어오르는 포즈를 취했다. 북핵 대응과 통상 마찰 해결을 위한 초당적 외교 협력이 있었다. 노회찬(정의당), 홍영표(민주당), 김성태(자유한국당), 장병완(민주평화당), 김관영(바른미래당) 당시 원내대표와 박경미 전 의원(오른쪽에서 셋째). 뉴스1

2018년 7월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한 여야 5당 원내대표 등 국회의원들이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뛰어오르는 포즈를 취했다. 북핵 대응과 통상 마찰 해결을 위한 초당적 외교 협력이 있었다. 노회찬(정의당), 홍영표(민주당), 김성태(자유한국당), 장병완(민주평화당), 김관영(바른미래당) 당시 원내대표와 박경미 전 의원(오른쪽에서 셋째). 뉴스1

상대 정파에 친일 또는 종북의 꼬리표를 붙이고 서로 삿대질하는 정치는 이제 끝내야 한다. 대통령이 야당에 초당적 외교·국방 협력을 주문하고, 야당 지도자가 이를 수용하는 것이 선진 외교·안보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제2의 6·25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막는 것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초당적인 협력과 국민의 단단한 연대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