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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 시신 틈에 父가…" 여순사건 74년만에 첫 정부 추념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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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70년 넘게 남모르게 피눈물" 

19일 전남 광양시 광양시민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제74주기 정부 합동 추념식에서 유족인 김명자 씨가 자신의 사연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전남 광양시 광양시민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제74주기 정부 합동 추념식에서 유족인 김명자 씨가 자신의 사연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순사건 당시) 얼마나 총을 쐈는지 시신들이 피범벅이 돼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할머니께서 고무신을 벗어 도랑물을 퍼 날라 일일이 시신들 얼굴을 씻어낸 뒤에야 아버지를 찾았을 수 있었다.”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 유족 김명자(74·여)씨는 19일 전남 광양시 광양시민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합동 추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추념식은 사건 발생 74년 만에 정부 주최로 처음 열렸다.

김씨는 “지난해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장면을 뉴스로 지켜보며 기분이 착잡했다”며 “70여년 넘도록 남모르게 피눈물 흘릴 땐 나 몰라라 했다가 왜? 인제 와서야…”라고도 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일으킨 군사 반란이다. 당시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국군과 경찰, 민간인 다수를 잔혹하게 살해하면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뿐 아니라 폭동 진압 군경에게도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재판 없이 민간인 학살…피해자 2만여명 추산

국군에 생포된 여순반란사건 주모자. 중앙포토

국군에 생포된 여순반란사건 주모자. 중앙포토

19일 전남 광양시 광양시민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제74주기 정부 합동 추념식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전남 광양시 광양시민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제74주기 정부 합동 추념식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추념식에는 정부 대표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김영록 전남지사, 김대중 전남도교육감, 전남 6개 시·군 단체장, 국회의원, 유족,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오전 10시 광양과 순천 전 지역에 1분가량 묵념 사이렌이 울렸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추념사를 통해 “여순사건은 좌우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한 해방 정국 속에서 무고한 국민이 이념의 총·칼에 무참히 희생당한 사건”이라며 “희생자들은 마을회관·학교· 논밭에서 싸늘한 주검이 돼 가족 품에 안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여순사건의 유족회와 함께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더욱 속도를 내겠다”고 덧붙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영상 추념사를 통해 “여순사건은 해방 후 혼돈의 시대 상황에서 발생한 우리 현대사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이자 크나큰 비극”이라며 “진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기록하고 국민 여러분과 함께 그 가치를 되새기면서 역사적 의미를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명예회복 첫걸음…과제도 산적

여순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 중앙포토

여순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 중앙포토

여순사건 특별법은 지난해 6월 국회에서 통과돼 지난 1월 21일 시행됐다. 특별법에 근거해 국무총리 소속의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돼 진상 규명에 나섰다. 하지만 특별법은 반란에 가담해 무차별 살인, 방화를 저지른 가해자와 억울한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지난 6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제3차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희생자 45명과 유족 214명을 처음으로 결정했다. 올해 정부 주최 추념식 개최와 함께 특별법 제정, 희생자·유족 공식 인정 등으로 여순사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첫걸음을 뗐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별법 제정 후 신고된 피해 건수는 3200여건으로 추산치인 피해자 2만여명을 크게 밑돈다. 당시 사망자들이 수사를 받은 절차나 재판 과정에서 입증된 증거 등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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