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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장현성, 눈도 안마주치고 편지 333통만 읽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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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러브레터' 주연 배우 장현성(왼쪽부터), 배종옥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 권혁재 기자

연극 '러브레터' 주연 배우 장현성(왼쪽부터), 배종옥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 권혁재 기자

상연시간 90분 내내 두 배우가 편지만 읽는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다음달 13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러브레터’(연출 오경택)는 남녀 주인공이 47년 간 주고받은 편지 333통을 번갈아 읽는 걸로 극 전체를 진행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초등학교 때 만난 주인공 멜리사와 앤디가 각각 예술가‧정치인이 되어 노년에 이르기까지 50년 가까운 세월, 엇갈리는 감정들을 오직 편지 글을 읽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연기해야 한다.

연극 '러브레터' 주연 배종옥·장현성

마지막 단 한순간을 제외하면, 공연 중 배우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원작자 A.R. 거니(1937~2017)가 1988년 뉴욕 초연 때부터 극본 첫 장의 작가노트에 주문한 대로다. 배우의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연기 교본 같은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에서 장기 공연하며 엘리자베스 테일러, 시고니 위버, 톰 행크스, 멜 깁슨 등 유명 배우들이 거쳐 갔다. 한국에선 한양대 연극영화과 최형인 교수가 1995년 제자들과 공연한 바 있다.

이번 공연으로 처음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 주연 배우 배종옥(58)‧장현성(52)은 “공연을 하면 할수록 어려운 작품”이라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을 14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처음엔 대사를 외우지 않고 편지 읽는 거니까 재밌게 하자 했는데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요. 상대 배우를 보지 않으니까, 서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작품이죠.”(배종옥)

“인생이란 어떤 것이구나 생각하기 전에 너무나 잔인하게 지나 가버리잖아요. 이렇게 편지 만으로 세밀하게 감정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게 형식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온 힘을 다해 배종옥 씨 대사를 들으면 알아서 공연이 진행되죠.”(장현성)  

장현성 "편지로 듣는 인생, 저를 쿡쿡 찔렀죠"

연극은 생일 파티 초대 감사카드로 시작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도 편지로 끝난다. 부유하지만 부모의 이혼 후 불안정한 생활을 거듭하는 멜리사와 그런 멜리사를 사랑하면서도 선망하던 상류층 진입을 위해 멜리사와 점점 거리를 두는 앤디. 편지 속에서만은 순수하고 솔직한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의 삶과 점차 괴리가 커진다. 원작자 거니가 미국 주류 지배 계층의 허위의식을 풍자한 대목이다.

50년간 편지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에 관한 연극 '러브레터'가 다음달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배우 2명이 출연하는 2인극으로 배종옥과 장현성이 중년, 박정자와 오영수가 각각 중년페어, 노년페어를 맡았다. 사진 파크컴퍼니

50년간 편지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에 관한 연극 '러브레터'가 다음달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배우 2명이 출연하는 2인극으로 배종옥과 장현성이 중년, 박정자와 오영수가 각각 중년페어, 노년페어를 맡았다. 사진 파크컴퍼니

배종옥은 “현실에 존재하는 두 사람과 편지 속 두 사람이 다르다는 걸 끄집어낸 작가가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면서 앤디와 멜리사가 실제로 만난 이후 ‘어깨 너머로 계속 다른 사람을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한 대목을 들었다.
장현성은 “멜리사의 인생을 편지로 보는데도 어떤 순간 저를 쿡쿡 찔렀다. 그 힘을 받아 제 연기도 앞으로 나아갔다”면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멜리사가 “우리가 그때 만약에…” 하고 줄임표로 맺었던 편지글을 인상 깊게 꼽았다.

또 “사랑은 만 가지 얼굴이 있다. 애틋하고 쓸쓸하고 견딜 수 없게 설레는 것 이면에 고통이나 인생에서 쭉 봐왔던 사람의 상실을 바라보는 것까지 복잡하고 다양하다”면서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뤄낸 놀라운 서사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의 인생을 가까이서 계속 바라보며 느끼는, 모두 한번쯤 경험했고 그려봤던 그런 마음을 서정적으로 환기한다”고 작품의 의미를 꼽았다.

그가 신체를 제한시킨 채 감정 연기를 하는 고충으로 “연극의 3분의 2 지점쯤 되면 목 뒤가 아프고 뛰쳐 일어나고 싶어진다”고 털어놓자 배종옥이 이를 법륜 스님의 명상 수업에 빗댔다.
“명상 수업도 3박4일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고통스럽거든요. 감정 표현을 못 하니까요. ‘러브레터’에서 장현성 씨는 장문의 편지를 지겹지 않게 전달해야 하니까, 더 힘든 작업을 했죠.”(배종옥)

배종옥 "이 나이, 이 에너지에 딱 맞게 찾아온 연극"

연극 '러브레터' 배종옥. 사진 파크컴퍼니

연극 '러브레터' 배종옥. 사진 파크컴퍼니

배종옥은 “‘러브레터’가 이 나이, 이 에너지에 딱 맞게 찾아온 것 같다. 할수록 작품에 빠져든다”면서 “지금 보셔야 한다. 공연은 끝나면 없다. 그게 묘미”라고 했다. 1985년 KBS 특채 탤런트로 데뷔해 안방스타로 활약했던 그가 30대부터 불현듯 연극 무대에 도전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드라마 ‘거짓말’(KBS2, 1998) 이후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뉴욕에 갔다는 그다.

“여배우가 서른다섯이 넘으면 아줌마 역할밖에 안주던 시대에요. 어떤 배우로 살아야 하나, 힘들었던 때에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티파니 웍’을 봤죠. 티파니 하면 보석을 생각하는데 그림까지 이 사람은 쉬지 않고 작업했구나, 나도 멈추면 안 되겠다. 현실과 타협할 수 없다, 내 길을 꿈꿔야 한다고요.”
무대에 오른 후에도 “안 해도 되는 연극을 왜 이렇게 하느냐고 다들 그랬다. 잘한다는 평가보다 ‘어색하다. 드라마에서 보인 카리스마가 무대에선 안 보인다. 하다 말겠지’란 얘기가 많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계속 무대에 선 이유는 드라마에선 풀리지 않은 갈증이었죠. 배우로서 성숙하고 싶었고, 지금도 무대에서 많이 배웁니다.”

"박정자·오영수 실버팀 공연 전혀 달라. 놀라운 마법"

연극 '러브레터' 장현성. 사진 파크컴퍼니

연극 '러브레터' 장현성. 사진 파크컴퍼니

‘러브레터’는 두 사람과 나란히 원로배우 박정자‧오영수가 실버팀으로 더블 캐스팅돼 공연 중이다.
장현성은 “전혀 다른 공연이다. 호흡, 리듬, 템포가 다르다. 가장 놀라운 연극의 마법은 여든 넘은 배우들이 어린 척하지 않는데도 연극이 시작되고 어느 지점이 지나면 편지 속 11살, 12살 짜리 아이들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든다는 것이다. ‘별거 아니야. 괜찮아’ 주인공들의 삶을 그런 식으로 차분히 연기하시는 데 정말 놀랍다”고 했다.

배종옥은 “선생님들이 묵묵하게 앉아서 편지를 읽으시는 걸 바라보며 나도 저런 배우가 되자고 또 다시 꿈꿨다”고 했다. 영화‧드라마를 넘나드는 그는 연극의 차별점을 바로 이런 순간에서 찾았다.
“한 연출이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다양한 미디어의 시대에 연극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고요. 공연은 보려면 시간을 내서 거기에 가야 하죠. 원할 때 아무 데서나 재생할 수 없어요. 그런 게 오히려 공연의 힘 아닐까요. 같이 호흡하고 에너지를 받는 것. 과연 무엇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연극 '러브레터'에선 박정자와 오영수가 실버팀 주연을 맡았다. 사진 파크컴퍼니

연극 '러브레터'에선 박정자와 오영수가 실버팀 주연을 맡았다. 사진 파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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