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면 죽는다…‘작은 아씨들’ 지금 시대정신 담은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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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서교동 카파에서 만난 정서경 작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tvN.

17일 서울 서교동 카파에서 만난 정서경 작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tvN.

“요즘엔 사람들이 돈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주식이 올랐는지, 비트코인은 팔았는지 같은 이야기를 인사처럼 하잖아요. 대학생들이 영어 공부하고 시험 준비하는 것처럼 재테크가 자기 계발의 한 부분이 됐달까. 한동안 작업실에서 혼자 일 하다가 바깥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조금씩 달라져 있는 걸 느끼는데 이게 지금의 시대 정신이구나 싶었죠.”

두 번째 드라마 성공리 이끈 정서경 작가 #칸 수상작 ‘헤어질 결심’ 아카데미도 도전

17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정서경(47) 작가가 밝힌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1868년 미국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현재 한국 사회의 가난한 세 자매와 막대한 부를 축적한 권력층의 이야기로 풀어내 시청률 11.1%(닐슨코리아)를 기록하는 등 큰 사랑을 받았다. 정 작가는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오면 꺼내 읽게 되는 책 중 하나였는데 커서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고 말했다.

“‘작은 형제들’도 현실에 순응했을까”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청교도적 세계관에 순응하는 모범적인 느낌이었는데 ‘작은 아씨들’이 아니고 ‘작은 형제들’이어도 그랬을까요? 아버지가 참전한 남북전쟁에 대해서도 전혀 의문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한국의 자매들은 착하지 않은 느낌으로 쓰고 싶었어요. 스스로 길을 개척해가는.”
그는 “결국 작가들은 어렸을 때 흡수한 이야기를 자신의 문법으로 재창작해나가는 것 같다”며 "소년들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이야기를 읽고 자라는데 그 당시 소녀문학은 많지 않아서 인간관계의 갈등에 주목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작은 아씨들'에서 오인주(김고은),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 세 자매가 사는 옥탑방. 가난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진 tvN

'작은 아씨들'에서 오인주(김고은),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 세 자매가 사는 옥탑방. 가난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진 tvN

드라마 속 700억원의 비자금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와 촘촘히 연결돼 있다. 세 자매의 가난은 IMF 이후 도박에 빠져 필리핀으로 도망간 부모로부터 비롯됐고, 한국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정란회의 시작은 베트남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작가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모두가 가난해지고 소수의 지주만 부자가 되는 경험이 반복됐다. 부자가 되는 것과 가난해지는 플롯이 동일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 부흥 출발점을 쫓다 보니 베트남 전까지 가게 됐다. 세 자매가 돈을 얻게 되더라도 그 돈이 어디서 왔고 얼마나 많은 죽음과 욕망이 서려 있는지 알았으면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넷플릭스 공개 이후 베트남에서 “한국군 1인당 베트콩 20명을 죽였다” 등의 대사가 문제가 돼 현지 방영이 중단된 것에 대해서는 “뼈아프게 생각한다”며 “작품을 쓸 때 국내 뿐 아니라 국외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앞으로 더 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쟁으로 모두 가난해지는 경험 반복”

'작은 아씨들'의 원상아(엄지원) 관장과 박재상(엄기준) 서울시장 후보. 부잣집 장군 딸과 광부 출신 운전기사 아들로 만나 여러 대립쌍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진 tvN

'작은 아씨들'의 원상아(엄지원) 관장과 박재상(엄기준) 서울시장 후보. 부잣집 장군 딸과 광부 출신 운전기사 아들로 만나 여러 대립쌍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진 tvN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민낯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시장 후보가 된 박재상(엄기준)이나 가난한 집 첫째 딸로 태어나 700억 앞에 흔들리는 오인주(김고은)의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이들의 욕망이 출발한 지점은 같다. 정 작가는 “가난과 부, 낮은 곳과 높은 곳,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 다양한 대립 쌍을 보여주면서 그 축을 전속력으로 왔다 갔다 하며진자 운동 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 “가난은 겨울에 티가 나요” 등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 같은 대사도 화제가 됐다. 정 작가는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로 3회에서 인주가 열무김치통에 돈을 담으며 되뇌인 “가난하면 죽는다”를 꼽았다.
병원 갈 돈이 없어 갓난아기 때 죽은 셋째 이야기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지만 자매들 삶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셈이다. “첫째는 감성, 둘째는 이성, 막내는 영혼 담당이면 한 명은 유년기의 종말을 알리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가난의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정했다”는 설명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그는 “한 번도 미래가 풍족할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자매들이 사는 옥탑방 역시 대학생 때 친구들과 살던 공간과 비슷하다고 했다. “똑바로 서서 샤워할 수 없는 욕실도 그렇고, 창문이 안 닫혀서 불 끄고 맥주 마시고 했거든요. 개미들 다니는 길 피해 다니고. 전 그때도 낭만이 있고 좋은 기억이었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가난에 대한 불안이 더 큰 것 같아요.”

“박찬욱 감독 끝까지 밀고 가는 힘 느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사망자의 아내와 사건 담당 형사로 만난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 사진 CJ ENM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사망자의 아내와 사건 담당 형사로 만난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 사진 CJ ENM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헤어질 결심’은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이 공동 집필한 작품이다. 2003년 정 작가가 공모전에 출품한 단편 ‘전기공들’을 당시 심사위원이던 박 감독이 인상 깊게 보면서 ‘친절한 금자씨’(2005)를 시작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아가씨’(2016) 등 다섯 번째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관객 수는 188만명에 그쳤지만 N차 관람이 이어지고 각본집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헤결앓이’ 현상을 낳았다. 한국 영화 대표로 내년 아카데미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 작가는 “개인적으로 가장 깊게 다가온 영화여서 칸에서도 상을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느낌이었는데 영미권 관객들도 깊게 받아들여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하나의 컴퓨터에 두 대의 모니터와 키보드를 두고 함께 쓰는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헤어질 결심’을 제외하면 그동안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지 출발점이 감독님으로부터 온 경우가 많았다.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가기 위해서는 목적 의식과 동력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박 감독에게 정 작가가 있는 것처럼 조력자가 필요하진 않냐는 질문에 “늘, 항상 필요하다”면서도 “혼자 쓰는 시간을 중시한다. 요즘은 감독님과도 따로 쓰는 시간이 더 많다”며 웃었다.

2018년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마더’에 이어 두 번째 드라마를 성공리에 마친 그는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다. 처음엔 12부작을 어떻게 혼자 쓸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고 했다.
“‘마더’는 16부작인데 15번 지고 1번 승리하는 이야기라 보는 분들이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작은 아씨들’은 소소한 승리를 많이 주고, 4부에 한 번은 승리하게 하고 싶었죠. 그런데 매회 영화 한 편처럼 썼더니 정보량 조절에는 실패한 것 같아요. 지금 구상 중인 이야기는 드라마도 있고, 영화도 있는데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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