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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삼성가(家)와 ‘골프계의 피카소’ 톰 파지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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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가리 8번 홀. 사진 콩가리 골프클럽

콩가리 8번 홀. 사진 콩가리 골프클럽

21일(한국시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더 CJ컵이 열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리지랜드의 콩가리 골프장은 톰 파지오가 설계했다. CJ컵은 2020년엔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의 섀도 크릭, 지난해엔 역시 라스베이거스의 더 서밋 클럽에서 열렸다. 모두 톰 파지오 설계 코스다.

톰 파지오(77)는 미국의 유명 코스 설계자다. 천재적 미적 감각을 가졌다는 평가다. 그가 만들면 이런저런 '100대 코스'에 대부분 들어가며, 최고 골프 건축가 상을 여러 번 받았고 골프 명예의 전당에도 입회했다.

골프 코스 디자인의 피카소를 찾는다면 톰 파지오다. 피카소처럼 가장 그림(설계도면)값이 비싼 설계자이기도 하다.

삼성가의 장손인 이재현 회장이 이끄는 CJ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미국에서 대회를 열면서 파지오 전시회를 여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CJ 측은 “여러 조건에 맞는 최고의 코스를 찾다보니 우연히 톰 파지오 설계 코스가 3연속 대회장이 됐다”고 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CJ는 파지오와 연결됐다. 파지오 코스가 이재현 회장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다른 삼성가 사람들은 피카소를 원했다.

콩가리 골프클럽 3번 홀 그린. 사진 콩가리 골프클럽

콩가리 골프클럽 3번 홀 그린. 사진 콩가리 골프클럽

파지오는 골프장 설계비 흥정을 안 한다. 싫으면 말라는 식이다. 미국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골프계의 큰손인 일본, 한국, 중국에 그의 코스가 하나도 없다.

강원도 원주에 오크밸리 골프 리조트를 운영했던 한솔 그룹이 2009년 즈음 ‘톰 파지오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한솔그룹의 이인희 고문은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장녀다. 한솔은 오크밸리의 가장 좋은 땅에 파지오 코스를 건설하려고 했고 어렵사리 설계도를 받았다.

파지오에게 설계비로 얼마를 줬는지는 알 수 없다. 100억원 설이 있다. 한 관계자는 “파지오 관련 각종 비용으로 200억 원이 들었다”고 했다.

한솔로서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당시 리먼 사태 후유증으로 국내 골프장 회원권 분양 경기가 나빴다. 또한 파지오는 “경사도가 3% 이상이면 골프장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단다. 오크밸리는 산악지역이어서 토목공사 비용이 천문학적이었다.

톰 파지오가 라스베이거스 사막에 만든 섀도 크릭 골프장. 사진 섀도 크릭

톰 파지오가 라스베이거스 사막에 만든 섀도 크릭 골프장. 사진 섀도 크릭

한솔은 건설을 보류했다. 이후 경영상태가 좋지 않아 2018년 말 오크밸리의 경영권을 HDC(현대산업개발)에 넘겼다. 이인희 고문은 2019년 1월 작고했다.

HDC는 파지오의 설계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진전되지 못했다.

한솔 측 한 인물은 “어렵게 허가까지 받아 놨는데 그 도면을 버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의 마스터피스 코스가 될 도면을 날리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HDC 측은 “성토량이 워낙 많아 산을 다 깎아야 하며 지금은 원형보존지 훼손 등으로 허가도 안 난다. 도면이 아까워 몇 개 홀이라도 쓸까 고민했으나, 그건 파지오 도면의 도용이라서 안 된다고 한다. 우리도 안타깝다”고 했다.

결국 파지오의 도면은 빛을 보지 못했다. 골프 설계의 피카소 같은 존재 톰 파지오가 그린 도면이 실제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국 골프계에서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한솔이 파지오를 위해 남겨뒀던 부지에는 베어크리크 홍천 등으로 주목받는 뛰어난 설계가 노준택씨가 새 코스를 그려 최근 완공했다. 요즘 최고 코스로 주목받는 성문안이다. 골프계에선 노씨가 파지오의 설계를 어느 정도 참고는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파지오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크밸리의 성문안 골프장. 톰 파지오가 설계를 했으나 건설되지 못하고 노준택씨가 새로 설계해서 문을 열었다. 사진 성문안 골프장

오크밸리의 성문안 골프장. 톰 파지오가 설계를 했으나 건설되지 못하고 노준택씨가 새로 설계해서 문을 열었다. 사진 성문안 골프장

신세계도 톰 파지오와 관계가 있다. 신세계의 폐쇄적인 회원제 골프 클럽인 트리니티는 톰 파지오 주니어가 설계했다. 톰 파지오의 아들이 아니다.

톰 파지오의 형인 짐 파지오의 아들이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은 골프에 대한 애정이 많다. 톰 파지오 설계도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파지오가 한솔 측과 맺은 계약에 ‘오크밸리 이외 한국에서 설계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포기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대안으로 또 다른 톰 파지오를 택했다.

CJ컵이 열리는 콩가리는 2018년 1월 개장한 신코스다. 콩가리는 이 지역에 사는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골프장 짓기에 가장 좋은 모래땅 지형으로 호주 로열 멜번 골프장 같은 수직 벙커들이 있다. 페어웨이와 그린이 단단하고 빨라 변별력이 높다.

지난해 PGA 투어 팔메토 챔피언십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대회에선 파 71에 7655야드로 조성됐는데 7810야드까지 가능하다. 13번 홀부터 15번 홀이 승부처다.

콩가리 골프클럽

콩가리 골프클럽

콩가리 클럽의 소재지인 릿지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였다. 골프장 창립자들은 골프를 통해 번 돈으로 학교를 만드는 등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올해 대회엔 지난해 우승자 로리 매킬로이 등 뛰어난 선수들이 참가한다. 김주형과 임성재를 비롯, 한국 선수 13명이 참가한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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