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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친일 프레임, 그 진부함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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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정치권이 해묵은 친일 논란으로 격전을 벌이고 있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권의 친일파 소환은 이제 너무 진부하고 상투적이며 시대착오적이다. 국어사전에서 친일파를 찾아봤다.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와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약탈 정책을 지지·옹호하여 추종한 무리’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1910~45)는 벌써 77년 전 끝났다. 당시 친일파 가운데 생존자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일 텐데, 이들이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한국인이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여행지가 일본이고, 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글로벌 문화가 K팝· K드라마가 된 지 오래다. 지난 11일부터 일본이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자 인천국제공항은 북새통이 됐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다.

일제 77년 전 끝났는데 친일파 논란
지금 최대의 위협은 일본 아닌 북한
감정이 아니라 힘 있어야 나라 지켜

지난 11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이른 초가을 추위에 겨울 옷차림을 한 평화의 소녀상.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 잡혀 있어도 안 된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이른 초가을 추위에 겨울 옷차림을 한 평화의 소녀상.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 잡혀 있어도 안 된다. 연합뉴스

문제는 친일 프레임으로 한·일 관계를 왜곡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시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미·일 동해 연합 군사훈련을 두고 “극단적인 친일 행위, 극단적인 친일 국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끊임없이 분쟁지역화하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데, 일본을 끌어들여 군사훈련을 하면 일본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아무리 과해도 지나치지 않은 게 맞다. 임진왜란 이후 불과 300년 만에 다시 침략에 나섰던 일본의 호전성을 모르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다른 건 몰라도 일제의 과거 악행을 잊은 한국인은 없다. 일본인과 대화 중 무심코 ‘일본X들’이라고 실언하는 사람도 봤다. 뼛속 깊이 일본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독일과 프랑스는 19세기 말부터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른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을 무력화하기 위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리자 이에 반발한 독일이 전쟁을 일으켜 양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또다시 피를 흘렸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지금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강철 대오로 뭉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두 나라에는 ‘친불파’ ‘친독파’ 같은 과거지향적 프레임이 없다. 미래를 위한 협력과 선의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1963년 엘리제 조약을 통해 정상회담과 외교·국방 회담을 정례화하고 있다. 공동의 적으로 떠오른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토대다. 학생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근 1000 만명이 교류한 것도 신뢰를 키웠다.

안타깝게도 한·일 양국은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청와대 수석이 죽창가를 부르고 반일(反日) 감정을 선동했다. 우경화 경향을 보인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주도로 일본이 핵심소재 수출을 규제하자 규탄에 나섰다. 하지만 감정을 앞세울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배터리 보조금을 제외했다고 죽창을 들자고 하지는 않는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감정적 대응으로 해결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냉혹하게도 국익 앞에서는 우방도 없다. 배터리 보조금 차별이나 수출규제가 그랬다. 이런 허들을 넘어서려면 외교력을 높이고, 초일류 기술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무기 제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상대로 언제라도 핵 버튼을 누르겠다고 협박한다면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삼척동자도 알 만한 문제 아닌가.

일본이 아무리 우겨도 독도는 한국 땅이다. 한국이 지킬 힘을 가진 한 일본이 넘보지 못한다. 한국은 100년 전의 무기력한 나라가 아니다.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고, 4차 산업혁명의 게임체인저가 된 반도체 강국이고, 신흥 방산 수출국이며, 문화 소프트 강국이다. 무엇이 두려워 죽창가를 계속 불러대려는 건가. 진부한 친일 프레임을 버리고 이제는 북핵 위협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