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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해바라기, 예술과 선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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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

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

지난주 전 세계를 가장 놀라게 한 뉴스 중 하나는 영국의 환경단체 멤버 두 명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 반 고흐(1853~1890) 작품에 토마토 수프를 끼얹은 사건이었다. 아나(Anna)와 포브(Phobe)라는 이름의 이 두 젊은 여성은 저스트 스톱 오일 (Just Stop Oil)이라는 환경단체 회원인데, 이 단체는 영국 정부에 화석연료 신규 허가와 생산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시위를 벌여왔다. 지난 7월에도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의 그림의 액자에 손을 붙이는 시위를 했다.

이 단체는 점차 심각해지는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과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시위들을 벌인다고 주장해왔다. 수프를 던진 직후에 아나와 포브는 “예술을 지키는 것이 환경과 삶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합니까?”라고 외쳤다. 내셔널 갤러리의 반 고흐 그림은 유리액자로 보호되어 있었기에 다행히 손상되지 않았다.

영국 환경단체 토마토 수프 투척
“예술이 환경보다 중요한가” 주장
고흐가 준 희망과 위로 부정한 셈
설익은 구호는 되레 세상을 오염

관련 뉴스에서는 이 그림이 1200억원이나 하는 엄청나게 비싼 작품임을 앞다투어 보도하지만 고흐가 왜 이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이 왜 인류에게 중요한지는 막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1887~1888년 고흐는 파리와 남프랑스 아를에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렸다. 특히나 이번에 테러를 당한 이 해바라기는 고흐가 평소 존경하던 화가인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을 아를의 자기 집으로 맞이하기 이전에 그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이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유화, 1888, 92.1x73㎝. [사진 영국 내셔널 갤러리]

반 고흐의 ‘해바라기’ 유화, 1888, 92.1x73㎝. [사진 영국 내셔널 갤러리]

고흐에게 노랑의 컬러는 빛나는 태양과 삶에 대한 환희와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고흐는 평생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가 뜰 때 벌판에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해바라기 그림을 그린다고 썼다. 여러 톤의 노랑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한 이 해바라기 그림들에서는 태양을 머금고 힘차게 태동하는 꽃의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계절의 변화 속에 토양의 에너지를 받아 피어나고 다음 계절이 오면 사라지는 겸허한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 작품을 훼손하고 이들의 주장을 전파하고자 한 것은 그래서 참 아이러니하다. 고흐는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고 나서 2년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생전 작품 한 점 제대로 팔아보지 못하고 무명 화가로 가난 속에서 지는 꽃처럼 사라져버린 반 고흐는 그만의 독특한 화법과 색채, 그리고 예술만을 위해 살았던 불꽃 같았던 그의 삶으로 인해 유명해졌고 현대에 와서 그의 작품들은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린다.

해바라기 연작 외에도 고흐가 남긴 작품들은 오랜 삶을 이어오면서 인류에게 크나큰 위로와 희망을 주어 왔다. 세계의 미술관들에서 실제로 해바라기 그림을 볼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세계인이 미술사 책이나 인터넷 이미지를 통해 이 그림을 보고 각기 다른 감상과 감동을 하는지 상상해보라.

환경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예술이 환경보다 더 지킬 가치가 있냐고 주장하는 외침은 공허하고 어리석고 무모하다. 토마토 수프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그릇된 정책을 펴서 환경 오염을 주도하는 정치인과 기업인이다. 심사숙고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외침은 오히려 인류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우매하고 설익은 정신을 선동하는 단체들에 오늘도 얼마나 많은 아나와 포브들이 동참하고 있는가.

이들이 퍼포먼스 직후에 외친 질문인 “예술이 생명, 식량, 정의보다 소중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대답하고 싶다. “예술이 생명, 식량, 정의보다 중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예술이야말로 이들을 수호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예술이야말로 인류에게 아름다움, 자연, 희망, 열정, 행복, 삶, 죽음과 같은 가치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사유의 공간을 선사한다. 이로 인해 무르익은 생각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과 자연과 삶을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