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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푸르메가 고발한다

'尹탄핵' 대자보 찢겼다, '조국 대자보' 후 또 드러난 저급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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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최근 철거 문제로 이슈가 된 서울대 대자보. 오른쪽은 홍콩 민주화 시위 관련 대자보를 훼손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자보. 중국인 유학생이 찢는 것을 막기 위해 마오쩌둥 사진을 바탕에 깔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왼쪽은 최근 철거 문제로 이슈가 된 서울대 대자보. 오른쪽은 홍콩 민주화 시위 관련 대자보를 훼손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자보. 중국인 유학생이 찢는 것을 막기 위해 마오쩌둥 사진을 바탕에 깔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서울대가 요즘 대자보로 시끌시끌하다. 서울대 출신인 현직 대통령 탄핵을 거론한 내용도 물론 한몫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남이 붙인 대자보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학생사회 불문율을 깨고 누군가 게시 이틀 만에 대자보를 훼손(철거)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생활과학대 22학번이라고 밝힌 한 학부생은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각기 다른 내용의 대자보를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에 붙였다. 학생회관 게시판은 서울대 학생이면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에, 지난 2019년 조국 사태 등 주목도가 높은 시국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으레 대자보가 붙는 자리다. 대략 열흘쯤 뒤 자진철거가 원칙이지만 자율 게시기한을 넘겼더라도 보통 일주일은 더 기다렸다가 철거한다. 새로운 대자보가 붙지 않으면 몇 달씩 그대로 방치되다 학생회가 일괄 철거하는 경우도 있다. 중앙도서관 통로의 자유게시판 역시 학교가 직접 관리하는 공식 게시판과 달리 학생회관과 비슷하게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일단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으면 다른 게시물로 기존의 대자보를 가리지 않고, 본인이 직접 떼는 게 원칙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대자보를 붙인 학생은 뗀 적이 없다는데 이 두 장의 대자보 모두 이틀 만에 사라졌으니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진 거다.

대학생이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대자보 하나 철거했다고 무슨 야단법석이냐고 힐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번 철거 사건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서울대를 비롯해 대학가에서 대자보가 갖는 의미는 여전히 상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대에선 지금까지 대자보 내용이 학교 안팎에서 큰 화제를 모았거나 작성자가 기증하는 경우엔 자치도서관으로 옮겨 아예 영구보존하기까지 해왔다. 유명인사의 정제된 평론도 아니고 한 학생의 의견일 뿐인 대자보에 이렇게까지 의미 부여를 하는 건 대자보 내용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자신의 소신을 공표한 학우를 존중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 대자보가 드러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토론을 독려하려는 의도도 있다.

2013년 대학가에서 유행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의 효시가 된 고려대에 붙었던 대자보. 중앙포토

2013년 대학가에서 유행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의 효시가 된 고려대에 붙었던 대자보. 중앙포토

온라인이 오프라인 활동을 위협할 만큼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온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서 대자보가 갖는 의미는 그만큼 크다. 실제로 대자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학내에 알리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여론에까지 영향을 끼친 사례도 적지 않다. 내가 서울대에 입학하기 전인 오래된 일이지만 2013년 전국 대학가를 휩쓸었던 '안녕들하십니까?' 릴레이 대자보가 대표 사례다. 고려대에 처음 게시된 대자보가 각 대학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당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가 폭로된 바 있다. 한마디로 ‘대자보 공론장’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얘기다.

이런 대자보 공론장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꼭 지켜져야 하는 운영 규칙이 있다. 우선 대자보를 작성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과 요구를 명확하게 글로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의견을 덧붙이려면 포스트잇에 적어 대자보 여백에 붙인다. 원래 대자보의 내용에 크게 반대하는 경우 아예 반대자보를 써서 원 대자보 옆에 붙이기도 한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남이 쓴 대자보를 멋대로 훼손하거나 철거하는 행동은 금기시돼왔다. 대자보의 훼손은 곧 공론장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와 동일하게 간주해온 탓이다.

2020년 8월 서울대에서 훼손된 조국 교수 사퇴 촉구 집회 알림 대자보. 주최 측에서 찢긴 대자보를 이어붙인 뒤 교내에 전시했다. 중앙포토

2020년 8월 서울대에서 훼손된 조국 교수 사퇴 촉구 집회 알림 대자보. 주최 측에서 찢긴 대자보를 이어붙인 뒤 교내에 전시했다. 중앙포토

그러나 최근 대학가에서 대자보 훼손 사례가 점점 많이 목격되고 있다. 서울대만 놓고 얘기하자면 지난 2019년 9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대자보 때부터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당시 관련 대자보는 법학전문대학원 게시판에 붙었다가 사흘 만에 반으로 찢어진 채 발견됐다. 같은 해 12월 중앙도서관 통로 벽면에 조 전 장관의 서울대 교수직 사퇴를 촉구하는 대자보가 게시되었으나 또 훼손됐다. 외부인이 한 것인지, 단순히 정치적으로 반대성향인 다른 학생이 한 것인지 확인된 바는 없으나 당시 학생들은 훼손의 주체가 누구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분개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대자보가 철거된 거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난 무단 철거된 대통령 탄핵 요구 대자보가 명문(名文)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그 내용에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번 대자보를 놓고 사실 학내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다. 작성자는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이관섭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에게 문자를 보낸 사실을 거론하며 ‘유 총장은 이 수석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실의 감사원에 대한 업무지시는 명백한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개된 유 총장의 문자를 대통령실의 업무지시로 단정하고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기엔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하지만 이런 비판도 대자보의 사실 오류나 논리적 허점을 반박하는 반대자보를 붙이는 등 정상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단 철거하는 건 빈약한 대자보의 논리보다 더 크게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대자보를 훼손하는 명분이 무엇이든 공론장을 왜곡시키겠다는 악의로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2019년 11월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 붙었던 신전대협의 대자보. 이 단체 회원 김모씨가 대학 건물에 침입했다는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1심에서 벌금 50만원 형을 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중앙포토

2019년 11월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 붙었던 신전대협의 대자보. 이 단체 회원 김모씨가 대학 건물에 침입했다는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1심에서 벌금 50만원 형을 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중앙포토

지난 2019년 12월이 떠오른다. 홍콩민주화운동 연대 대자보 훼손 사건으로 전국 대학가가 한창 뒤숭숭하던 때다. 당시 중국 본토 유학생들은 대학가에 붙은 홍콩 지지 대자보를 마구 훼손했고, 한·중 양국 학생이 캠퍼스 안에서 충돌하는 일까지 있었다. 서울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비슷한 일을 목격한 적이 있다. 중국어 욕설로 가득 메워진 홍콩 지지 대자보 앞에서 울분을 터트리던 한 학우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중화사상에 찌든 애들이 한국에 와서도 자신들이 세계 중심인 줄 착각하며 무례하게 군다.” ‘중화사상’을 ‘진영논리’로 바꿔보면 대자보 한장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찢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저급한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동일성에만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한마디로 전체주의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진정 민주사회를 지켜내려면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이더라도 경청한 후 토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자보를 뜯어내는 사회를 그냥 용인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