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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이런 적이 없었다…'1달러=150엔' 붕괴 초읽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본 엔화와 미국 달러화. 로이터=연합뉴스

일본 엔화와 미국 달러화. 로이터=연합뉴스

아시아 금융시장에 위기의 불안감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엔화값의 자유낙하에 ‘1달러=150엔’을 눈앞에 두면서다.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1달러=150엔'이 무너지면 해외 자금 이탈 등이 이어지며 엔저 영향권에 들어가 있는 한국 등 아시아 금융시장이 소용돌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엔화값은 제대로 미끄럼을 타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 이어 18일 도쿄외환시장에서도 엔화 가치가 한때 달러당 149엔까지 하락(환율 상승)했다. 자산 가격 버블 붕괴로 엔화 가치가 달러당 160엔 수준까지 밀렸던 1990년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갔다.

32년만에 최저치로 추락한 엔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엔화의 하락 속도는 빠르고 가파르다. '날개 없는 추락'이란 표현이 딱 맞다. 올해 초 달러당 110엔대였던 엔화가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미끄럼을 탔다. 이후 지난달 2일에는 달러당 140엔대까지 밀렸다. 2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지난 12일 '1달러=146엔'을 찍은 뒤, 이튿날인 지난 13일 '1달러=147엔'대로 미끄러졌다. 지난 14일엔 '1달러=148엔'대를 밟은 뒤 2거래일 만에 달러당 149엔까지 밀려 내려갔다. '1달러=150엔'은 엔화가치의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진다.

'1달러=150엔' 붕괴가 초읽기 수준에 이르며 일본 통화 당국이 또다시 외환시장에 개입할지도 시장은 주시하고 있다. 일본 통화당국은 지난달 22일 엔화가치가 달러당 145.90엔까지 밀리자, 24년 만에 시장에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는 시장 개입에 나섰다.

완화정책 고수하는 일본은행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

문제는 일본의 시장 개입이 ’반짝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엔화가치의 하락 배경에는 일본은행(BOJ) 역주행 통화정책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긴축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행은 통화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17일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물가 목표의 안정적·지속적 달성을 위해 대규모 금융완화와 초저금리 정책 등 완화적 통화정책기조가 적절하다"며 완화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3회 연속 기준금리를 0.75%포인트(자이언트 스텝) 인상한 미국과의 금리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일본 단기금리(-0.1%)와 미국 기준금리(연 3.0~3.25%)의 격차는 3.3%포인트가 넘는다. 게다가 미국이 연말까지 최대 1.25%포인트의 금리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일본에서의 자금 이탈은 더 빨라질 수 있다. 엔화 하락세가 더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엔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엔화 약세는 그동안 한국 수출에 악재로 여겨졌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이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는 원화가치도 큰 폭으로 하락한 데다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경합도가 하락한 만큼 과거와는 다르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조의윤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한국 수출상품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차별화되면서 엔저의 영향이 미미해졌다”고 말했다.

오히려 문제는 금융시장이다. 엔화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거래량이 많은 통화다. 다른 아시아 통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 원화는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와 함께 움직이는(동조화) 경향을 보인다. 엔화가치의 급락이 '1달러=1430~1440원'에 머무는 원화가치 하락을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의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2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가 크게 절하되면서 9월 들어 한국 원화의 평가절하 속도가 빨라졌다”고 언급했다.

게다가 엔화가치 하락은 수퍼 달러를 가속화한다. 엔화는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1973년=100)의 구성 통화 중 하나다. 엔화값이 떨어지면 달러 인덱스가 밀려 올라간다. 결국 엔화가치 하락이 원화가치 하락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엔화 폭락 아시아 금융시장 흔들 우려도 

엔화가치 하락이 아시아 금융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자산운용 회장은 지난달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1달러=150엔' 등 특정 지지선이 뚫리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같은 규모의 혼란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엔화가치가 폭락하면 해외 펀드가 아시아 시장 전체에서 자금을 회수하는 등 대규모 자본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1997년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공황에 빠진 투자자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채권을 대량 회수하며 아시아 외환위기가 촉발한 것과 비슷한 원리다.

비슈누 바라탄 싱가포르 미즈호은행 수석 전략가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는 (아시아 시장에서) 큰 '닻' 역할을 하기 때문에 (두 통화의 약세는) 아시아 전체 무역과 투자의 통화 흐름을 불안정하게 할 위험이 있다"며 "우리(아시아)는 이미 2008년 세계금융위기 수준의 스트레스를 향해 가고 있고, 다음 단계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이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 해외 자산 매각에 나설 수 있는 것도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시장에서 엔화 약세를 우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유동성 회수 리스크 때문”이라며 “일본 경제와 금융시장이 불안해질수록 일본 정부 혹은 연기금이 해외 자산을 매각하고 유동성 확보에 나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세계금융시장에서 자산을 던지고 그로 인한 자산 급락 사태가 빚어지면 금융시장 전반의 충격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흔들리는 것도 아시아 금융시장의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올해 중국 경제성장률이 3%대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중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 시장의 침체와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박 연구원은 “블룸버그 등이 말하는 금융위기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 금융위기 리스크는 정말 일본이 공격적으로 자금을 회수한다는 전제조건에 더해, 중국 경제의 신용 불안 등이 고조되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국가의 경제 체력(펀더멘탈)이 과거보다는 좋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외환 곳간(외환보유액)도 나름 두둑이 쌓았기 때문이다. 탄 테크 렁 UBS자산운용사 인도·태평양국장은 최근 미 CNBC방송에서 "아시아 신흥국의 경제가 강화됐고, 정부의 대비 수준도 높아진 데다 훨씬 유연한 환율 제도를 가졌다"며 "통화 붕괴 위기가 임박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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