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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표식 청년들 사라졌다" 카자흐 넘어온 러 청년의 증언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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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15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의 기차역 내 모습. 김홍범 기자

지난 15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의 기차역 내 모습. 김홍범 기자

러시아 국경에서 300㎞ 떨어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 그곳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린 징집령을 피해 국경을 넘은 러시아 청년들이 있었다. 지난 14~15일, 입국자를 위한 임시 인구서비스센터에서 그들을 만났다.

러시아 청년들은 이곳에서 ‘개인식별번호(INN)’를 발급받는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은행이 발급한 카드는 해외에서 쓸 수 없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은행 계좌를 개설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INN이 필수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 위치한 인구서비스센터에서 러시아 남성들이 개인식별번호(INN)을 받고 있는 모습. 김홍범 기자

지난 14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 위치한 인구서비스센터에서 러시아 남성들이 개인식별번호(INN)을 받고 있는 모습. 김홍범 기자

이곳에서 만난 대부분은 기자와 대화하는 것을 꺼렸다. 어렵게 말문을 튼 드미트리(33, 이하 가명)는 “회사에 2주간 휴가를 간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전쟁을 둘러싸고 세대 간의 견해차가 있다고도 했다. 그는 “온종일 러시아 국영 방송을 보는 아버지는 나에게 ‘도망가선 안 된다. 푸틴을 응원하면 러시아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부분 동원령이 발동된 이후 러시아군을 지지한다는 의미의 ‘Z’ 표식을 단 (젊은) 러시아인은 사라졌다”고 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인구서비스센터 앞에서 만난 시베리아 지역 출신의 33세 남성 드미트리(가명)가 보여준 'Z' 표식이 붙은 자동차.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 발동 이후 이번 전쟁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이 표식이 거리에서 대부분 사라졌다고 했다. 김홍범 기자

지난 14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인구서비스센터 앞에서 만난 시베리아 지역 출신의 33세 남성 드미트리(가명)가 보여준 'Z' 표식이 붙은 자동차.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 발동 이후 이번 전쟁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이 표식이 거리에서 대부분 사라졌다고 했다. 김홍범 기자

모스크바에서 어머니와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온 일리야(26)는 징병을 피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도 국영 방송에서 전하는 뉴스를 믿지 않는다. 친구들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고 했다. 드미트리와 일리야 모두 군 복무 경험이 없는 청년들로 원칙적으로 동원령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원령이 확대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징병 초기 엉뚱한 사람이 징집 통지서를 받는 등 러시아 정부의 일처리도 못 미더워한다.

카스피은행의 한 지점까지 이들을 따라갔다. 은행은 러시아인들이 몰려들자 지난 3일부터 임시로 전담 지점을 열었다. 창구는 29번까지 있었다.

14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카스피 은행에서 러시아인에게 별도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스타나 임시 지점에서 러시아인들이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김홍범 기자

14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카스피 은행에서 러시아인에게 별도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스타나 임시 지점에서 러시아인들이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김홍범 기자

아내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블라디미르(36)는 여기까지 오는 데 1000만원 가까이 지출했다. 그는 군 동원령 발동 후 해외로 나가기로 마음먹고 ‘5일짜리’ 터키 여행상품을 샀다. 그러나 가격은 30만 루블(약 690만원)로 평소보다 몇 배나 비쌌다. 그는 “(카자흐스탄에 와서) 미국 비자를 신청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며 “아이들이 러시아에 남아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러시아 국경까지 택시를 탄 뒤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는 한 남성도 있었다. 그는 “가족과 일이 다 러시아에 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직업은 어떻게 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고 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국경 지역인 러시아 첼랴빈스크주 마린스키에서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으로 탈출하기 위한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국경 지역인 러시아 첼랴빈스크주 마린스키에서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으로 탈출하기 위한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AP=연합뉴스

한 청년은 러시아 내에서 푸틴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 지지는 통제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왔다는 게오르기(28)는 “푸틴 대통령의 실제 지지율은 20%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푸틴은 과거에 있는 것 같다. 현대의 국경은 어느 정도 국제사회의 합의에 따른 것인데, 전쟁으로 땅을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여론조사센터에서 최근 발표한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81.1%였다.

다만 러시아인들은 미국 등 서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한 남성은 “미국이 이라크를 특별한 이유 없이 침공했을 때 전 세계는 왜 지금처럼 비난하지 않았나. 그리고 동진하지 않겠다고 했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선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나”라며 “서방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임시 센터와 은행 창구 주변엔 러시아인을 돕는 카자흐스탄 봉사자들이 여럿이었다. 자원봉사를 자처한 다나(30)는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를 내고 있는 러시아인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며 “연락하라”고 말했다. 이들은 온정적 도움과 별개로, 이번 사태로 자국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드러냈다. 68세의 한 카자흐스탄 봉사자는 “전쟁에 반대하기 때문에 (전쟁을 피해) 탈출한 러시아인을 돕고 있다”면서 “러시아 지배층은 카자흐스탄 북쪽 영토를 러시아가 선물로 줬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고 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러시아인의 은행 카드 발급을 위해 설치된 카자흐스탄 카스피 은행 임시 지점 앞에서 러시아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홍범 기자

지난 14일(현지시간) 러시아인의 은행 카드 발급을 위해 설치된 카자흐스탄 카스피 은행 임시 지점 앞에서 러시아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홍범 기자

이민자 증가로 인해 아스타나 현지인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들로 인해 임대료 등 생활비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최근 아스타나 원룸의 월세는 30만 텡게(약 90만원)로 지난달 초보다 2배 이상 올랐다. 러시아 페름에서 온 남성은 원룸 한 달 임대비용으로 60만 텡게(약 181만원)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일자리 경쟁 우려도 있었다. 다나는 “지금 러시아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학력에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라며 “그래서 아스타나 사람들이 일자리를 걱정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정상회담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 카자흐스탄 외교부

지난 13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정상회담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 카자흐스탄 외교부

일각에선 탈출한 러시아인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 카자흐스탄 정치인 무크타르 타이잔은 “솔직히 지금 입국하는 러시아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지는 모른다”며 “이들은 곧 뭉쳐서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할 거다. 우리의 안보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카자흐스탄 정부에 따르면 이달 초까지 20만명이 넘는 러시아인이 카자흐스탄에 입국했고, 같은 기간 동안 약 14만7000명이 카자흐스탄을 떠났다. 러시아는 이달 초 ‘70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는 언론 보도를 부정했지만, 그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달 말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라를 떠난 이들을 우리가 돌보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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