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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트럼프보다 무서운 자가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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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로마가 불타는 게 보고 싶다.”

21세기 로마인 미국에 대해 마치 빈 라덴인양 증오를 표출하는 자가 있다. 아마 미 대사관에서 비자 받기 힘든 자일테다. 하지만 독일계 미국인인 그는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가장 혁신적인 투자가이다. 그의 이름은 피터 티엘이다. 혹시 주식 투자 좀 해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거물이다. 온라인 지불 시스템 혁신을 일으킨 소위 페이팔 마피아의 리더이자 『제로 투 원』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말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름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도 스타일과 행보는 다르지만 이 마피아의 일원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인 그가 왜 미국이 불타는 걸 원할까?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티엘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기득권 체제(딥 스테이트)를 불태우려 한다. 그는 구글 독점 기업, 바이든 민주당, 아이비리그 대학 등을 기득권의 진앙지로 지목한다. 이들 리버럴 기득권이 중국과의 패권 싸움이 아니라 중국과 결탁해 미국의 국익을 배신했다고 고발한다. 심지어 그는 바이든을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인 페탱에 비유한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르네 지라르 등 서구 비주류 사상계보에 대한 극우적 해석을 통해 자유주의와 여성주의를 극히 혐오하는 일베 스타일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티엘이 트럼프보다 백 배 더 위험
사악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자
보호주의와 기술주의 융합한 괴물
감시 자본주의 기업제국을 꿈꿔

아직도 트럼프 현상을 단지 러스트벨트 백인 노동자의 반란이고 실리콘밸리는 이를 견제하는 민주당의 기반이라고만 생각하는 분들은 좀 더 넓은 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때 실리콘밸리는 68 혁명의 유산 속에서 군산복합체 이미지보다는 더 쿨한 세상에 대한 혁신의 열기로 기억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시대정신은 맥스 채프킨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기자의 2021년 책 『Contrarian-티엘처럼 관습적 견해와 반대로 베팅하는 자』에 따르면 티엘 식의 정보 감시 기업 이미지와 좀 더 닮아 있다. 티엘이 만든 벤처 기업 팔란티어는 미국 국방부와 경찰 등에 이어 전 세계에 정보 감시 기술을 팔며 천문학적 돈을 벌고 있다. 더구나 이제 그는 스티브 배넌 등 워싱턴 정가의 극우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걸 넘어 자기 사도들을 선거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번 중간 선거에서 최고의 화제 인물인 오하이오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인 밴스는 당선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티엘 추종자이다.

트럼프가 다시 대선에 도전하는 건 상대적으로 덜 두렵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와 규범은 그래도 트럼프와 같은 즉흥적인 마피아 보스 스타일과는 싸울 체력이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도구로 미국과 전 세계를 자신의 사기업 팔란티어의 이윤과 극우 세계관의 실험장으로 바꾸고자 하는 티엘과 같은 세력은 매우 두렵다. 왜냐하면 그는 다가올 혼돈의 세상과 기술을 미리 꿰뚫어 보는 천재적 안목과 천문학적 자본, 그리고 일관된 파시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주류가 경제 펀더멘탈이 튼튼하다고 헛소리를 할 때 이미 2007년에 1년 후 다가올 경제위기를 예견했다. 그리고 이미 2010년경부터 트럼피즘의 시대를 예고해 왔다. 정작 티엘을 비웃던 실리콘밸리의 저명한 리버럴 기업가들은 그가 백악관 회의에서 트럼프 바로 옆자리에 앉는 현실을 씁쓸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무능하기보다는 차라리 사악해지자.’

티엘의 인생 좌우명이다. 사실 그는 민주당의 큰 정부론을 혐오하고 자유지상주의를 설파하면서도 자신의 사기업과 국가의 거대한 결탁은 자랑할 만큼 얼굴이 두껍다. 그리고 상대를 끝까지 파멸시키는 음험한 계략의 귀재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민주당에게 대선을 몇 번 헌납해 결국 무리한 정책을 추구하게 하다가 이를 핑계로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사석에서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는 ‘반지의 제왕’ 광팬이자 파시스트인 멜로나가 총선에서 승리했다. 피터 티엘도 반지의 제왕 덕후라서 그의 팔란티어 기업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온갖 기행과 모험을 거듭하는 그가 향후 베팅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자신의 통제를 받는 대선후보와 정치세력을 만들 경우 우리는 진짜 두려운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티엘 유형의 ‘감시 자본주의’ 기업 제국 대 시진핑 유형의 디지털 스탈린주의가 대결하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보호주의나 트럼프의 재집권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분들은 사실은 너무 낙관주의자들이다. 바이든은 그래도 좋은 인품을 가진 분이고 트럼프는 마초인척 해도 사실은 겁쟁이다. 미국의 진짜 위험성은 사악해지는 걸 두려하지 않으면서 보호주의와 기술 디스토피아에 대한 천재적 본능을 결합한 티엘 같은 이들이다. 이들 군산복합체의 거대한 욕망과 냉혹한 계산 속에서 한반도는 지금 더 위험한 구렁텅이로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과연 미국과 한국은 이 국수주의와 감시자본주의 제국, 그리고 극우 세계관이 기묘하게 결합한 괴물의 성장을 제어할 수 있을까?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