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정쟁을 국경에서 멈추게 하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한미일 대잠 합동 훈련에 참여한 함정들이 지난달 30일 동해 공해상에서 기동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일본 해상자위대 신형 준이지스급 구축함 아사히함, 미국 유도미사일순양함 챈슬러스빌함, 미국 원자력 추진 잠수함 아나폴리스함, 미국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함, 한국 구축함 문무대왕함, 미국 이지스 구축함 벤폴드함. [일본 방위성 제공. 연합뉴스]

한미일 대잠 합동 훈련에 참여한 함정들이 지난달 30일 동해 공해상에서 기동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일본 해상자위대 신형 준이지스급 구축함 아사히함, 미국 유도미사일순양함 챈슬러스빌함, 미국 원자력 추진 잠수함 아나폴리스함, 미국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함, 한국 구축함 문무대왕함, 미국 이지스 구축함 벤폴드함. [일본 방위성 제공. 연합뉴스]

 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명언 가운데 “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는 말이 있다. 1948년 미국 야당이던 공화당 출신의 상원 외교위원장 아서 반덴버그가 민주당 정권의 대외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에 손을 들어주면서 한 이 말은 여야 정쟁이 외교ㆍ안보 문제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의 협력을 발판으로 트루먼 행정부는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창설을 실행할 수 있었다. 중대한 외교 정책에는 여야가 초당적 협력을 하는 미 의회의 전통은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안보 상황은 반덴버그의 협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북한의 위협 앞에서 여야는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냐 없냐는 신학 논쟁을 벌이면 안 된다. 푸틴의 전술핵 사용 불사 발언에 유독 한국 정치권만 둔감한 걸 보면 푸틴의 다음 순서가 김정은이란 사실을 잊은 듯하다. 엊그제 시진핑은 대만 통일에 무력 사용이란 선택지가 있다고 공언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 침공이 현실화되면 전략적 유연성을 행동 원칙으로 삼는 주한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이 빠져나갈 수 있다. 김정은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신냉전 초입에 서 있는 2022년 대한민국은 구(舊)냉전 초입이던 1948년 미국 의회ㆍ행정부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정쟁을 국경에서 멈추기는커녕 국경 밖의 문제까지 안으로 끌어들여 정쟁의 소재로 삼는 데 여념이 없다. 이럴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대일(對日) 외교 공방이다. 늘 그랬듯 기승전결의 결은 친일(親日)-반일(反日) 프레임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말 동해에서 펼쳐진 한ㆍ미ㆍ일 연합훈련을 ‘극단적 친일 국방’이라고 몰아쳤다. 동해 훈련은 대잠수함 훈련이 주축이었다. 왜 그랬을까.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이 임박한 정황과 무관치 않다. 북한 잠수함이 핵탄두를 탑재해 동해로 빠져나오는 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협이다. 우리 군은 사활을 걸고 북한 잠수함을 탐지하고 추적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아는 대로 이 분야 최고의 능력과 노하우는 일본 자위대에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달 11~13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일본과의 군사협력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49%로 ‘불필요하다’는 의견(44%)을 앞지른 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외교 정책의 방향과 방법론을 놓고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고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되는 훈련을 정쟁 거리로 삼아 안보 태세를 약화시키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편협한 역사관에 매여 국민의 평균적인 안보 상식에도 못 미치는 발언을 계속하는 건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의심으로 직결된다. 문재인 정부 시절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파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안보를 갉아먹는 정쟁을 국경에서 멈추게 하려면 야당뿐 아니라 여당의 노력도 필요하다. 반덴버그의 결단은 공화당의 고립주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반덴버그 자신의 소신에 따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보를 볼모로 삼는 ‘극단적 친일’ 공세에 ‘극단적 친북’이라 받아치며 맞불을 지르는 건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대응이다. 그런다고 우리 안보가 튼튼해지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ㆍ여당은 엄중한 안보 현실을 야당 지도자들에게도 설명하고 적정 수준에서의 정보를 제공하는 등 안보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노태우ㆍ김대중 등 역대 정부도 중대한 외교 현안이나 대북 정책을 실행할 때는 야당에 충실히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팬덤 지지층만 믿고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치기 했던 지난 정부만 예외였을 뿐이다.

안보 현실에 눈감은 '친일 국방론' #반덴버그의 초당 외교 결단 배워야 #여당도 정보 공유와 설득 노력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