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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이재명, 중도 잡아야 이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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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인생에서 잘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1998년 늦은 봄 초여름 무렵이다. 낙성대 부근 봉천동 자택으로 당시 조순 한나라당 총재를 가끔 찾아갔다. 출입처 동료 기자 몇 명과 함께였다. 97년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명예총재의 총재 복귀가 초읽기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DJ)에게 석패했던 이 명예총재는 정계 복귀와 당 장악을 서둘렀다. 당내 기반이 약했던 조 총재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내줘야 할 처지였다. 하루는 소위 ‘난닝구’ 차림의 그가 얼음이 담긴 잔에 위스키를 채워 벌컥벌컥 마셨다. 이 명예총재 측근들의 사퇴 압력이 강했던 시기였지만, 그는 관련 언급을 별로 하지 않았다. 대신 위스키를 계속 마시며 “총재 사퇴? 하하,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라고 호탕하게 던졌던 말이 기억난다. 대한민국을 호령했던 학계·정계 거물이지만 우군 없는 정치권에서 굴욕적인 사퇴를 강요받아야 했던 현실, 그에 대한 일종의 역설적인 외침으로 짐작된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해 “조 총재, 사퇴설 일축”이란 오보를 날린 기자도 있었지만, 어쨌든 얼마 뒤 그는 총재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기자의 추억 속에서 조 총재는 ‘난닝구’ 차림으로 강렬하게 떠났다.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떠난 조순 보다 돌아온 이회창을 더 기억한다. 정치란 무대는 그렇다.

사법리스크 와중 “친일 국방” 논란
대선 승리 좌우할 중도층 동의 난망
중도전략 실패 자인 이회창이 교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 총재의 복귀는 DJ에 1.6%포인트 차로 석패한 지 8개월 만이었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처럼 당시에도 빠른 복귀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다음 대선 승리와 정치적 미래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당내에선 “정치적 여백과 공백이 필요하다. 빠른 복귀는 오히려 감점”이란 우려가 많았다. ‘보수의 희망 이회창’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 치러진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또 고배를 마셨다. “한국의 보수 진영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의 대선 후보”로 평가받던 그가 당한 두 번째의 드라마 같은 패배였다.

1935년생으로 만 87세, 올 초 대선을 앞두고 인터뷰했던 그는 논리적이고, 꼬장꼬장한 20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의 논리가 한 치라도 잘못 전해질까 매 순간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려 했다. 수미쌍관과 기승전결이 여전히 ‘대쪽 판사’의 판결문 같았다. 보수 진영 내 최고라는 논리정연함과 정돈감이 여전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이 전 총재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을 일부러 찾아 꼼꼼히 읽어봤다. 2002년  패배에 대한 본인의 분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라는 국가 지도자의 일에 대한 정열과 판단력 그리고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유권자 중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층, 이른바 중도층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나는 이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강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다른 이유들을 열거하기에 앞서 중도층 전략 실패를 분명히 인정했다. 보수를 쥐락펴락했던 노정객의 회한이었다.

최근 정치권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이 전 총재를 비교하는 이들이 있다. 출신 배경과 학벌·경력·이념 등 모든 면에서 딴판인 두 사람을 동렬에 두고 분석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나 대선 석패, 대선 상대였던 현직 대통령과의 미묘한 관계, 무엇보다 패배 이후의 빠른 복귀, 강경 투쟁 쪽에 쏠린 대여 전략 등이 닮아있다는 얘기가 많다. 169석의 거대 야당을 이끄는 이 대표로선 이 전 총재가 “결국은 내 능력 부족이었다. 패배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며 내놓은 회고록 속 ‘패인 분석’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대표의 발걸음은 이와 정반대다. 한·미·일 연합훈련에 대해 “극단적 친일 행위이고 친일 국방”이라고 비난해 큰 논란을 부른 게 대표적이다. 당장 “사법 리스크 와중의 이 대표가 이 논란을 지렛대로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전례 없는 템포와 강도로 우리를 압박하는 북한엔 침묵하며 ‘반일’만 외치는 태도에 중도층들이 공감할 리 없다. 중도층은 대선 재수를 노리는 이 대표의 목줄을 쥐게 될 사람들이다. 이들은 노란봉투법 등 자신들이 동의하기 힘든 법안 처리 과정에서 이 대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숨을 죽이고 지켜볼 것이다. 윤 대통령의 고전에도 민주당의 지지율이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역시 중도층의 외면 때문 아닌가. 중도층 지지 없이는 이길 수 없다. 천하의 이회창도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