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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추상…이승조, 시대 앞서간 ‘파이프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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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승조 작가의 ‘Nucleus PM-76’(1969), 캔버스에 오일, 161.4x161.5㎝. [사진 국제갤러리]

이승조 작가의 ‘Nucleus PM-76’(1969), 캔버스에 오일, 161.4x161.5㎝. [사진 국제갤러리]

지난 6~8월 유영국(1916~2002) 20주기 기념 전시로 주목받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가 이번엔 이승조(1941~1990) 전시로 미술 애호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 기하 추상의 선구자였던 작가를 집중적으로 재조명하는 자리로, 이른바 ‘이승조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이승조 회고전이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이룬 작가의 예술세계를 미술사적으로 조망했다면, 이번 전시는 대중에 이승조를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전시작 30여 점은 모두 유족들의 소장품이다.

윤혜정 국제갤러리 이사는 “이승조 작가가 한국 추상회화의 흐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많이 알려질 기회가 없었다”며 “이승조 알리기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시대를 앞섰던 그의 실험과 시도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조는 이른바 ‘파이프 작가’로 불린다. 둥글고 긴 파이프 형상이 반복되는 캔버스, 숨막힐 듯 엄격한 구도, 차가운 금속 질감이 두드러지는 색조가 특징이다.

그의 파이프 형상은 캔버스에 무한한 깊이와 공간감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면에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캔버스에 무궁무진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파이프 건축을 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파이프의 형상을 소재로 평면성과 입체성,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환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조안 기(Joan Kee) 미국 미시건주립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이승조는 세심하게 절제된 재료, 색채, 구성적 전략, 형태를 통해 작업을 생동하는 역장 속 모든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추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1969년 이 작가의 모습. 파이프 그림은 1968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사진 국제갤러리]

1969년 이 작가의 모습. 파이프 그림은 1968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사진 국제갤러리]

이승조는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뒤 1945년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 오산중·고교 시절 미술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62년 권영우·서승원 등과 함께 기존 미술 제도와 기득권에 맞서 ‘오리진(origin)’을 결성했고, ‘아방가르드 그룹(AG)’ 창립에도 함께했다.

1968년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해였다. 제1회 ‘동아국제미술전’에서 대상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다. 국전에서 추상화가 서양화 부문 최고상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1971년까지 연달아 4회의 국전에서 수상했다.

그가 파이프 그림을 처음 선보인 것도 1968년부터다. 언뜻 보면 그의 작품은 디지털로 인쇄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붓으로 직접 그리고 칠한 것이다. 마스킹테이프로 캔버스에 경계를 정한 뒤 납작한 붓으로 유화를 입혀 파이프를 그렸다. 붓의 가운데는 밝은 물감을, 양 끝에는 짙은 물감을 묻혀 각 색 띠의 한 면을 한 번에 칠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색을 칠한 후엔 사포질로 표면을 갈아내 금속적인 느낌을 더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새롭게 우주의 공간 의식에 눈뜨고부터 시작”했다며 “이 작업이 작가인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이승조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토탈미술관, 독일은행 등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30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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