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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조선 왕 곤룡포 오묘한 붉은 빛…수십 번 홍염 끝에 나오죠

중앙일보

입력

조선시대가 배경인 사극을 보면 조선의 왕과 왕세자, 왕세손이 가슴·등·어깨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 옷은 왕이 가장 오랜 시간 입는 정복, 곤룡포입니다. 붉은색 곤룡포를 뜻하는 홍룡포는 머리에 쓰는 익선관과 더불어 조선의 왕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복장이에요. 이렇게 붉은빛으로 천을 물들이는 염색법을 홍염이라고 해요.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에 순응한 천연 재료만 이용해 색채를 빚어내는 예술이죠.

김경열 홍염장이 복원한 조선시대 장군용 두정갑옷.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붉은색은 높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김경열 홍염장이 복원한 조선시대 장군용 두정갑옷.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붉은색은 높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왕과 왕세자 등 권력자들이 주로 붉은색 의복을 입었던 만큼, 왕실 의복에 쓰이는 홍염 역시 전문 장인이 있었습니다. 전통 홍염 기법은 다행히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어요. 홍염을 복원·보존해 예술의 세계를 펼쳐온 장인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9호 김경열 홍염장(이하 김 장인)이죠. 권도준·김하윤 학생기자가 서울시 종로구에 자리 잡은 전통홍염공방을 찾아 홍염에 대해 알아보고, 직접 체험도 해보기로 했어요. 전통홍염공방은 김 장인의 작업실로, 전통 홍염 방식으로 재현한 여러 복원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손수건이나 스카프 등 전통 홍염기법을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어요.

"홍염이란 홍색이 나오는 염재를 만들어 천을 물들이는 작업이라고 들었어요.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염색하나요?" 공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던 도준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홍화와 소방목 등 홍색을 낼 수 있는 천연 재료죠." 국화과의 꽃인 홍화는 잇꽃이라고도 불리며, 콩과인 소방목은 염색 원료뿐만 아니라 약재로 사용되기도 해요.

권도준·김하윤(왼쪽부터) 학생기자가 홍염에 쓰이는 재료 중 하나인 홍화를 김경열 장인과 함께 살펴봤다.

권도준·김하윤(왼쪽부터) 학생기자가 홍염에 쓰이는 재료 중 하나인 홍화를 김경열 장인과 함께 살펴봤다.

천연 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홍염은 염색 원료 마련부터 많은 정성이 들어가요. 홍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공들여 재배한 홍화는 노란 꽃잎이 속에 붉은 기를 머금는 6월 말에서 7월경 꽃을 따서 바짝 말려 장독에다 넣어 보관하거나, 절구에 찧은 뒤 쌀뜨물에 헹구고 장독 안에서 발효시킨 뒤 납작한 홍떡으로 만들어 저장하죠. 이 시기 최대한 많은 홍화를 따서 저장해야 다음 해에 꽃이 필 때까지 사용할 수 있어요. 김 장인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공방 한구석에 있던 말린 홍화를 보여줬죠.

건조된 홍화는 자루에 담고 물에 넣어 황색소를 먼저 제거한 뒤, 콩대나 홍화대를 태운 잿물을 이용해 홍색소를 추출해요. 여기에 오미자초를 섞으면 알칼리성인 잿물과 산성인 오미자초가 만나 발색이 일어나서 염색에 사용할 수 있는 액체 물감, 염액이 됩니다. 또 원하는 색의 농도에 따라 많게는 수십 번도 더 반복해 물들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듣기만 해도 복잡하지 않나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9호 김경열 홍염장(맨 오른쪽)을 만나 홍염에 대해 알아보고, 손수건을 홍염으로 물들여봤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9호 김경열 홍염장(맨 오른쪽)을 만나 홍염에 대해 알아보고, 손수건을 홍염으로 물들여봤다.

홍염은 손이 많이 가고 전문성이 필요한 기술이기에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의복인 어의 및 궁내 일용품과 보물 등을 관리하던 상의원과 채색·염색·직조를 맡아보던 제용감에 각각 10명의 홍염장이 속해있었어요. 이들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여러 장신구, 특히 왕이 쓰고 입는 생활용품에 필요한 홍염을 담당했죠.

하윤 학생기자가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 왕이나 왕세자들의 정복은 붉은색이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라고 물었어요. "홍색이 권위를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이에요.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정삼품 상(上) 이상의 품계(당상관)에 해당하는 대신들이나 왕가의 사람들만 붉은색으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있었죠. 홍색도 진하기의 정도와 빛깔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왕이 입는 홍룡포는 신비로울 정도로 빨간 대홍색이죠. 대홍색은 여러 종류의 천연 염료 중에서도 홍화와 오미자초로 색을 내는데, 그 정도로 짙은 색깔을 내려면 보통 30회 이상 천을 물들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김경열 장인은 우리 전통 색채 문화의 중요한 기술인 홍염을 보전·전수하고 있으며, 홍염이 필요한 여러 문화재 복원에도 참여했다.

김경열 장인은 우리 전통 색채 문화의 중요한 기술인 홍염을 보전·전수하고 있으며, 홍염이 필요한 여러 문화재 복원에도 참여했다.

김 장인의 공방 안에는 대가리가 큰 쇠못인 금색 두정(頭釘)을 겉에 박아놓은 붉은색 두정갑옷이 있었는데요. 조선시대 장군의 갑옷을 복원한 겁니다. 또 중앙에는 홍염을 하고 테두리는 울금과 치자를 넣어 복합 염색을 한, 조선시대 왕비가 사용하던 방석을 복원한 작품도 있었죠. 장군의 갑옷과 왕비의 방석을 홍염한 천으로 만들었다니. 조선시대에 권위의 상징이 홍색이었다는 김 장인의 설명이 더 실감 나게 와 닿네요.

홍염은 옷감 염색에만 사용되는 건 아닙니다. 두정갑옷 옆에는 서책이 여러 권 꽂힌 책장이 있었는데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그 과정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종합 보고서인 의궤였죠.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의궤 복원 작업이 (2010년에) 진행됐는데, 당시 저는 서책 표장의 직물 복원 작업에 참여했어요. 요즘에는 넥타이나 스카프, 셔츠 등을 전통 시대 방식으로 물을 들이면서 현대적인 작품도 만들고 있죠."

홍염은 옷감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다양한 생활용품 제작에 필요했던 기술이다. 직물로 된 서책의 표장도 홍염으로 물들인다.

홍염은 옷감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다양한 생활용품 제작에 필요했던 기술이다. 직물로 된 서책의 표장도 홍염으로 물들인다.

김 장인의 설명을 듣던 도준 학생기자가 "동북아시아 3국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중국이나 일본에도 홍염과 같은 염색 방법이 있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물론 존재했죠. 기록에도 남아있어요. 우리나라에는 『규합총서』, 중국은 고문헌인 『천공개물』, 일본은 『연희식』이라는 책에 홍염에 대한 기록이 존재해요. 특히 우리나라 홍염은 (붉은색을 내는 염재에) 오미자초를 섞기 때문에 색깔이 더 풍부하고 맑다는 특징이 있죠. 우리나라 오미자가 특히 품질이 좋거든요. 그래서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중국·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오미자를 구하기 위해 애썼다는 기록도 남아있어요."

백문이 불여일견. 소중 학생기자단은 직접 홍염에 도전해보기로 했어요. 김 장인과 함께 작업실 마루를 내려가자 마당 한가운데 있는 붉은색 액체가 담긴 대야와 면 소재의 천 두 장이 눈에 들어왔죠. "이건 아까 언급한 홍염용 염료 중 하나인 소방목으로 만든 염액이에요. 소방목을 물에 팔팔 끓인 뒤 체에 거르면 나무에서 빨간 액체가 흘러나와 이렇게 붉은색 염액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 전통 염색 기법인 교힐염은 천을 염액에 담그기 전 특정 부분을 실로 묶어서 염액이 스미는 걸 방지한다.

우리나라 전통 염색 기법인 교힐염은 천을 염액에 담그기 전 특정 부분을 실로 묶어서 염액이 스미는 걸 방지한다.

천을 염액에 담그기 전에 어떤 부분을 실로 홀치거나 묶어서 그 부분은 물감이 배어들지 못하게 하여 무늬를 만드는 우리 전통 염색 기법을 교힐염(絞纈染)이라고 해요. 도준 학생기자와 하윤 학생기자는 김 장인과 함께 교힐염으로 홍염을 해볼 겁니다.

"먼저 천을 원하는 대로 접어서 고무줄로 끝부분을 묶으세요. 천이 접힌 부분은 염액이 스며들지 않기 때문에 천 고유의 흰색이 남아있게 되고, 그러면 붉게 염색된 다른 부분과 대조가 되면서 문양이 생기죠. 어떻게 묶어도 상관없어요. 대신 꽉 묶어야 해요." 도준 학생기자는 천을 삼각형으로 접어서 아래쪽 양 끝 각을 고무줄로 단단히 묶었죠. 그리고 맨 위쪽의 각을 김밥처럼 안쪽으로 돌돌 말아서 중앙을 고무줄로 한 번 더 고정했어요. 하윤 학생기자는 삼각형으로 접은 천의 꼭짓점 세 개를 다 고무줄로 묶었죠. 마음이 가는 대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천을 접은 소중 학생기자단. 과연 어떤 무늬가 탄생할까요.

홍염 재료 중 하나인 소방목으로 손수건을 붉게 물들여 본 소중 학생기자단.

홍염 재료 중 하나인 소방목으로 손수건을 붉게 물들여 본 소중 학생기자단.

"이제 고무줄로 고정한 천을 명반(明礬)을 푼 물에 담그고 조물조물 주물러보세요. 명반은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일 때도 사용하는데, 옷감에 염료가 잘 스며들게끔 돕는 매염제 역할을 해요. 홍염은 염액은 물론 매염제까지 인위적인 재료를 쓰지 않아요." 매염제까지 먹인 천은 소방목으로 만든 염액에 담급니다. 손에 염액이 묻지 않도록 비닐장갑을 끼고 고무줄로 묶은 천을 내가 원하는 농도의 색깔이 나올 때까지 염액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해요. "혹여나 염료가 손에 묻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소방목은 약재로도 쓰이는 재료랍니다."

붉게 염색이 된 천은 물로 헹궈서 겉에 묻은 불순물을 털어냅니다. 이러한 과정을 수세라고 해요. 그리고 천을 꽉 짜서 물기를 제거한 뒤 고무줄을 빼고, 천을 펼치면 흰색 문양이 있는 붉은 손수건이 되죠. 도준 학생기자의 손수건은 하얀 줄로 구획한 천에 원이 들어앉은 형태의 무늬가, 하윤 기자의 손수건은 원이 대칭적으로 박힌 무늬가 생겨났어요. 고무줄에 묶여 말린 천의 안쪽 부분에는 염액이 묻지 않아 생긴 무늬죠.

홍염은 붉은색을 낼 재료부터 염색을 돕는 매염제까지 자연에서 얻은 천연 재료만 사용한다.

홍염은 붉은색을 낼 재료부터 염색을 돕는 매염제까지 자연에서 얻은 천연 재료만 사용한다.

"김 장인님이 생각하시는 홍염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스스로 붉게 물들인 손수건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윤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홍염은 유기물로 만든, 살아 움직이는 색이에요. 계절에 따라, 혹은 바라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 보이죠. 저는 홍염의 그런 살아있는 매력에 빠졌어요. 또 홍염은 나라의 최고 어른이었던 임금님의 어의를 만드는 데 중심에 섰던 기능이기도 하죠. 그런 여러 매력 때문에 여기까지 왔네요."

우리 전통의 색채 문화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인 홍염을 수십 년간 지켜온 김 장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청명하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줄에 걸려 나부끼는 붉은 손수건이 더욱 특별해 보였어요.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미감은 여전히 한국의 문화 곳곳에 녹아있답니다.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우리 조상들에게 중요한 염색 방법, 홍염을 취재하게 돼 기대됐어요. 전통홍염공방을 방문해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홍염장 김경열 선생님을 만나 홍염에 대해 배우고, 직접 염색해보며 우리 전통 염색법인 홍염에 대해 알 수 있었어요. 손수건에 염색할 때 여러 번 담갔다 빼며 점점 색이 진해지는 것이 재미있었고, 과학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홍염의 과정에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어 홍화로 염색할 때는 알칼리성 잿물과 산성인 오미자초가 만나야 발색이 된다는 원리를 사용했는데, 옛날에 어떻게 이런 원리를 이용할 수 있었는지 정말 신기했죠. 이번 취재를 하며 우리의 전통문화에 자부심을 느꼈고,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홍염을 친구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권도준(서울 구룡초 4)학생기자

홍염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제가 김경열 홍염장님을 만나 취재할 기회를 얻게 돼 감사했어요. 홍염은 홍화를 푹 끓여서 만든 물에 천을 여러 번 담가 만드는 전통 염색 방법이에요. 저는 실로 천을 감아서 무늬를 만드는, 우리 조상이 만든 전통 염색 방법인 교힐염으로 손수건 염색을 해봤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됐어요.

김하윤(경기도 하스토리홈스쿨 4)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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