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성 A씨는 지난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한 대형병원에 신분증을 들고 가니 간략한 설명을 듣고 “연명의료행위를 받지 않겠다”는 취지의 문서를 작성하기까지 10분이 채 안 걸렸다. 그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얼마 전 시아버님도 폐암 수술을 받았다”며 “치료를 끝내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본인도, 가족도 모두 고통을 겪는 상황이 한탄스럽더라”고 했다. 이어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들에게 결정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신청하게 됐다”고 했다. 의향서 작성 후기를 인터넷에 올린 A씨는 말미에 “누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명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치료 거부를 통해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적었다.
인구 3%가 “연명의료 안 받겠다” 서약
16일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A씨처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이들은 지난달 말까지 146만474명으로 나타났다. 인구의 3% 정도다.

연명의료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수혈 등의 연명의료행위를 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데에 동의한다고 서약하는 문서다. 19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작성해둘 수 있다. 관련 제도가 도입된 2018년 등록자는 10만529명이었는데 2019년 43만2138명, 2020년 25만7526명, 2021년 36만8392명 등 매년 30만 명 안팎의 사람들이 의향서를 작성하고 있다.
‘존엄한 죽음’ 등 자신의 노후와 사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더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50대 B씨는 위암 투병 중인 아버지가 신청을 원해서 지난해 함께 작성했다. B씨는 “행복한 백세는 쉽지 않더라”라며 “혹시라도 생을 마감할 날이 온다면 가망 없는 치료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타인이 판단할 수 없어”
30대 C씨는 지난 7월 여름 휴가 때 의향서를 작성했다. 동네 복지관에서 관련 공개강좌를 듣고 상담을 거쳐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수강자는 대부분 노년층이었고 중년층이 소수 포함돼 있었는데 절반 가까이가 강의 후에 남아서 의향서를 썼다고 한다. 그는 “출생과 죽음만큼은 타인이 절대 판단 내릴 수 없는 영역”이라며 “가족들이 반발하면 내 뜻과 상관없이 연명의료를 받게 될 수도 있으니 미리 가족에게 말하고 뜻을 존중해달라 부탁해야겠다”고 했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정부에선 사전의향서 제출 수치를 홍보하지만, 실상 연간 사망자 중 의향서에 따라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이행된 경우는 10명 중 1명꼴에 그친다”고 말했다. 사망자의 90%는 임종 직전에 가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거나 그럴 여력이 안돼 가족 합의에 따르는 실정이라고 한다. 작성 기회를 더 늘려야 한다는 게 의학계의 지적이다. 사전의향서가 주로 건강할 때 미래를 대비해 작성하는 거라면,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 환자의 뜻에 따라 담당 의사가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기록하는 것이다.
“자기결정권 존중되게 접근성 높여야”
윤영호 교수는 “대부분 가족에 의한 결정에 따르는 상황이어서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며 “병원 입원 때나 건강검진 때 사전의향서를 희망하는 경우 작성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한 암환자가 혈액투석기 등의 연명의료 장치를 달고 있다. 중앙포토
사전의향서를 작성했더라도 자녀가 끝까지 연명의료를 주장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자녀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다는 게 현장 의료진의 고민이다. 유신혜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교수는 “의료진이 환자의 치료 거부에 수긍하더라도 치료를 주장하는 가족이 있다면 주춤하기 마련”이라며 “가족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윤리위원회와 상의할 수 있지만, 의료진에 부담스럽고 버거운 절차라 활성화돼있지 않다”고 했다. 유 교수는 “연명의료를 안 할 경우 처벌 조항은 있지만, 반대 조항은 없다”라며 “처벌 조항을 넣자는 건 아니지만, 의료진이 소신을 가지고 이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적·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