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오·덩의 길 모두 거부했다…자칭 '인민영수' 시진핑 노림수 [시진핑 시대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지난 14일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특파원

지난 14일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특파원

“폐쇄되고 경직된 옛길(老路)로도 가지 말고, 기치를 바꾸는 그릇된 길(邪路)로도 가지 말아야 한다.”
시진핑(習近平·69) 시대는 10년 전 중국공산당(중공)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낡고 나쁜 길을 거부하는 선언으로 시작됐다. 시진핑의 길은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과 다를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잘못된 ‘두 갈래 길’은 당시 18차 당 대회 정치보고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처음 낭독했지만 문건 작성팀장을 맡았던 시진핑의 생각이었다.

“현대화에 표준은 없다” 서구화 거부

시진핑의 길은 진화했다. 지난 7월 말 20차 당 대회 정치보고를 처음 토론하는 내부 회의에서 시진핑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서 ‘중국식 현대화’로 길의 방향을 바꿨다. “오직 하나의 현대화 모델도, 온 세상이 따라야 하는 현대화 표준도 없다”며 현대화가 곧 서구화라는 통념을 걷어찼다. 과거 베이징 컨센서스를 대체한 ‘중국 방안’이다. 그는 2035년까지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하고, 금세기 중엽 완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시진핑 시대를 금세기 중엽까지로 예고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1세대 지도자 마오쩌둥이 지난 1949년 10월 1일 건국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사진.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특파원

중국공산당 1세대 지도자 마오쩌둥이 지난 1949년 10월 1일 건국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사진.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특파원

마오쩌둥의 시대는 건국부터 1976년 그가 숨진 뒤 후계자 화궈펑(華國鋒) 실권(失權)까지 29년, 덩샤오핑의 시대는 개혁개방을 확정한 11기 3중전회가 열린 1978년부터 후진타오 퇴진까지 34년이었다. 시진핑은 지난해 세 번째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덩샤오핑→시진핑 시대로 이어지는 신중국 시대 구분론을 정립했다.

덩샤오핑 노선에 마오 노선 강화 

새 시대(New Era)로 부르는 시진핑 시대를 관통하는 노선은 마오와 덩의 혼합이다. 마오의 낡은 길은 ‘연속혁명’을 추구했다. 덩의 그릇된 길은 ‘개방과 시장’을 쫓다가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시진핑 시대는 둘을 변증법으로 결합한다.

그래서 등체모용(鄧體毛用)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덩샤오핑 식의 실용적인 경제발전 노선을 추구하지만, 군중의 힘을 동원했던 마오쩌둥의 권위주의 정치를 구사한다는 해석이다.

중국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의 초상화가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특파원

중국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의 초상화가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특파원

중공의 역대 당 대회를 예리하게 분석한 『권력의 극장』의 저자 우궈광(吳國光) 캐나다 빅토리아대 교수는 “마오쩌둥의 시대가 시장경제 없는 일당전제(專制)의 시대로 이를 변증법의 ‘정제(正題)’라고 부른다면, 덩샤오핑 시대는 공산당 일당전제지만 시장화를 도입해 ‘반제(反題)’라 할 수 있다”며 “둘을 ‘합제(合題)’한 시진핑 시대는 공산당의 일당전제는 더욱 강화하면서 덩 시대에 도입했던 공산당 통제 아래의 시장경제는 한층 약화하고 엄한 통제로 시장화가 야기했던 사회·문화·정치 분야의 후유증을 제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진핑 시대의 구호는 인민이다. 시 스스로 ‘인민영수’를 칭한다. ‘위대한 영수’ 마오와 차별했다. 공산당을 넘어 14억 일반 중국인에게서 권력의 정당성을 찾겠다는 노림수다. 마오는 “인민을 위한 봉사(爲人民服務)” 구호를 집무실이 자리한 중남해(中南海)의 정문 신화문(新華門) 앞에 친필로 새겨 놓았다. 마오의 인민은 신중국을 상징했다. 1949년 이후 만든 국가 기관 앞에는 인민 두 글자가 붙었다. 인민대학, 인민은행, 인민일보, 인민대회당…. 시진핑의 정치 캠페인 ‘초심을 잊지 말자(不忘初心·불망초심)’ 속 초심이 바로 인민이다.

미국·코로나19 위기론의 리더십 

‘금세기 중엽’까지 30년 안팎 이어질 수 있는 시진핑 시대는 격동의 시대다. ‘백 년의 대변국’이라는 용어를 만든 이유다. 이희옥 성균중국연구소 소장은 “‘백 년의 대변국’ 담론은 중국 특유의 위기의 리더십을 담았다”고 설명한다. 마오는 중·일 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문화대혁명의 격변을 헤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덩은 천안문 사태와 탈냉전의 격랑 속에서 경제를 내세워 막후 권력을 유지했다. 시진핑은 홍콩 시위 사태, 코로나19, 미·중 충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겪으면서 ‘백 년의 대변국’이란 위기 담론을 내놨다. 이희옥 교수는 “위기 정치는 집단 지도 체제를 ‘영수’ 리더십으로 대체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해명할 수 있는 구실이 되겠지만 체제와 사회의 불안을 부르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혁명·영수→시장·개방→중화민족

 5년마다 열리는 당 대회 정치보고에 언급된 키워드는 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마오쩌둥 시대 당 대회는 1945·1956·1969·1973·1977년 다섯 차례 열렸다. 정치보고에서 마오쩌둥은 1인 독재를 기반으로 끝없는 혁명을 추구했다. 평균 129.2회 언급됐다. 덩 시대 25.8회, 시 시대 13회를 압도했다. 영수는 평균 4.4회 등장했다.

덩샤오핑 시대 당 대회는 1982년부터 2007년까지 여섯 차례 열렸다. 덩은 혁명의 시대를 끝내고 시장과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시장은 41회를 기록했지만 시진핑 시대엔 절반보다 적은 15.3회로 줄었다.

시진핑 시대 들어 세 번째 당 대회가 16일 개막했다. 시진핑은 혁명도, 시장도 아닌 중화민족과 중국몽을 외쳤다. 각각 26회와 5.3회 등장했다. 개혁은 덩 시대 100회에서 57회로 줄었다. 개방 역시 44에서 26.3회로 줄었다. 시진핑은 이념과 경제 대신 민족과 애국주의로 집권의 정당성을 찾는다고 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