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선2035

아빠찬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대통령 풍자와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의 경고로 논란이 일었던 ‘윤석열차’ 덕에 전국학생만화공모전을 알게 됐다. 올해 만화제 중등부 금상 작품의 이름은 ‘아빠찬스’다. 중학생이 그린 이 그림은 꼭대기를 서울대로 잡고, 거기까지 오르는 4명의 사람을 보여준다. 부모의 직업과 재력에 따라 밧줄을 잡고 있는 자녀의 위치가 다르다.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소년에겐 정점에 다다르기엔 밧줄의 길이가 버거워 보인다.

이달 초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출장을 다녀왔다. 왕과 왕실이 있는 나라, 왕실 구성원이 국가 전체를 좌우하는 나라다. 왕족의 차량은 번호판부터 다르다. 일반 차량과 달리 아랍어로만 표기된다. 아라비아 숫자 번호판은 자릿수가 작을수록 비싸다. 파키스탄 이민자 2세인 하빕(29)의 차는 번호판이 5자리다. 그는 “두바이에서 왕실 차는 물론 두 자리 번호까지는 경찰도 안 건드린다”며 “계층은 옷 색깔로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날 때부터 삶의 수준과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는데 하빕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올해 전국학생만화공 모전 중등부 카툰 부문 금상 수상작 ‘아빠 찬스’. [트위터 캡처]

올해 전국학생만화공 모전 중등부 카툰 부문 금상 수상작 ‘아빠 찬스’. [트위터 캡처]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을 보면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국가장학금 신청자 중 소득 9·10분위(가구소득인정액 월 1024만원 이상) 학생이 48.2%를 차지했다.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코스인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생의 고소득층 비율은 더욱 높다. 올해 서울대 로스쿨의 국가장학금 신청자 중 고소득층(9·10분위) 비율은 65.1%였다. 2020년엔 60.3%였다.

강민정 한국고용정보원 전임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월평균 소득이 높을수록 취업 가능성과 대학원 진학률이 모두 올라갔다. 어느 대학을 가느냐부터 직장을 잡기까지 부모의 부(富)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가 올해 초 한국에 거주하는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씁쓸하다. 자녀가 성장한 이후 부모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려울 것이라는 응답자 비율이 60%였다. 2013년 진행한 조사에선 똑같은 질문에 37%만이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후 수치가 꾸준히 높아졌다.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조사 대상 19개국 중 16개국에서 ‘더 나빠질 것’이라는 사람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사람보다 많았다.

아빠찬스 그림이 희망적인 건 그래도 한국 사회에선 출발선이 다르다는 비판 의식이 남아 있다는 방증이어서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능력주의를 당연시하는 것이 불평등을 강화한다”고 했다. 시작점이 다른 현실에서 시험을 잘 본 사람,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 더 대우받아야 한다는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다. 중학생마저 그렇게 느낀다면 최소한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도 다시 논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