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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현대로템 반발하는 고속철 입찰기준...작년에도 똑같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은 조만간 신형 고속열차 17편성을 발주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은 조만간 신형 고속열차 17편성을 발주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현대차그룹 계열의 열차제작사인 현대로템과 관련 부품업체들이 조만간 코레일이 발주할 7000억원 규모의 고속열차 입찰기준안에 반발하며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코레일이 실시한 동종의 고속열차 입찰에서도 같은 기준이 적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현대로템은 기준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다만 납품가격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불참해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16일 코레일과 철도업계에 따르면 현대로템은 지난 8월 코레일이 영업 최고속도 시속 320㎞대의 동력분산식 고속열차(EMU-320) 발주를 앞두고 사전에 공개한 평가기준안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다. 코레일은 조만간 이 열차 136량(17편성)에 대해 국제경쟁입찰에 나설 예정이다.

 동력분산식은 맨 앞의 동력차가 뒤에 연결된 객차를 끌고 달리는 동력집중식(KTX, KTX-산천)과 달리 별도의 동력차 없이 객차 밑에 모터를 분산 배치해 주행하며 가ㆍ감속이 뛰어나다.

동력집중식과 동력분산식의 차이. 출처 현대로템

동력집중식과 동력분산식의 차이. 출처 현대로템

 당시 코레일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입찰자격에서 '시속 300㎞ 이상의 고속차량 제작 및 공급사업 경험'이란 항목을 뺐고, 국내외 업체 간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공동입찰도 허용했다. 협정체결국 간에 차별을 금지한 세계무역기구의 정부조달협정(WTO-GPA)에 따른 것이란 설명이다.

 반면 평가기준 중 납품실적은 ▶영업 최고속도 시속 320㎞ 이상의 철도차량 제작 납품(동등 이상 물품) ▶영업 최고속도 시속 200㎞ 이상의 철도차량 제작 납품(유사물품)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납품실적 평가에서 동등 이상 물품에 해당하면 최고 9점, 유사물품은 4.5점까지 받을 수 있지만 모두 해당 안 되면 0점으로 사실상 계약을 딸 수 없다는 게 철도업계 얘기다. 유사물품은 해당 제품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술력과 실적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러자 현대로템이 '시속 300㎞ 이상의 고속차량 제작 및 공급사업 경험'을 입찰자격에 다시 넣고, 납품실적 기준에도 동력분산식을 명시하며 특히 유사물품의 기준을 시속 250㎞ 이상의 동력분산식 차량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현대로템이 납품한 동력분산식 준고속열차인 EMU-260. 현재 이름은 KTX-이음이다. 연합뉴스

현대로템이 납품한 동력분산식 준고속열차인 EMU-260. 현재 이름은 KTX-이음이다. 연합뉴스

 이에 코레일은 입찰자격 요건은 국가계약법과 정부조달협정 등에 따른 것으로 변경이 불가하며, 납품실적은 변경 대신 지난해 기준을 그대로 사용하겠다고 답했다.

 작년 기준은 ▶영업 최고속도 시속 320㎞ 이상의 동력분산식 철도차량 제작 납품(동등 이상 물품) ▶영업 최고속도 시속 320㎞ 이상의 동력집중식 철도차량 또는 동력분산식 고속전기철도차량 제작 납품(유사 물품) 이었다.

 이에 따라 입찰자격과 납품실적 등 코레일의 입찰기준안은 모두 지난해 입찰 때와 똑같게 됐다. 당시와 달라진 건 중소규모의 열차제작사인 우진산전이 스페인의 고속열차제작사인 탈고와 손 잡고 입찰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발주 물량이 많이 늘어난 데다 조만간 수서고속철(SR)도 EMU-320 14편성의 발주를 준비 중이며, 수년 내로 기존 KTX와 KTX-산천을 대체하기 위한 대규모 입찰도 예정돼 있다. 보기 드문 큰 장이 이어지는 셈이다.

코레일의 고속열차 입찰에 우진산전이 스페인의 탈고와 손잡고 참가를 준비 중이다. 출처 위키백과

코레일의 고속열차 입찰에 우진산전이 스페인의 탈고와 손잡고 참가를 준비 중이다. 출처 위키백과

 이런 기회에서 현대로템으로선 사실상 독점이었던 국내 고속열차 시장에 뜻밖의 경쟁자가 나타난 셈이다. 철도업계에선 현대로템이 유사물품 기준 변경을 요구한 것도 우진산전·탈고 컨소시엄을 겨냥한 거란 해석이 나온다.

 우진산전과 탈고는 물론이고 현대로템도 지난 2016년 EMU-320 두 편성을 수주만 했을 뿐 코레일에 아직 납품하지는 못해 동등 이상 물품의 점수는 얻지 못한다.

 소음 등의 문제로 재설계에 들어가 납품이 3년 가까이 미뤄진 상황으로 최근 한 편성을 출고했지만, 시험운행 등 여러 절차를 거쳐서 합격해야 납품이 이뤄진다.

 관건은 유사물품이다. 유사물품 규정을 '시속 250㎞ 이상의 동력분산식'으로 바꾸면 KTX-이음(EMU-260)을 납품한 현대로템만 득점이 가능하고, 동력분산식 납품실적이 없는 우진산전과 탈고는 점수를 못 받아 사실상 낙찰이 불가능해진다.

SR도 연말에 EMU-320 14편성을 발주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SR도 연말에 EMU-320 14편성을 발주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익명을 요구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현대로템이 그동안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기술개발 투자를 소홀히 하고 납품가만 올려온 게 사실"이라며 "경쟁 자체를 피하려고 지난해와 동일한 입찰기준의 변경까지 요구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도 최근 국회 국정감사 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해외제작사의 참여를 제한할 경우 상호주의에 따라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이 어려워질 우려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현대로템 측은 "지난해 입찰 때부터 코레일에 바뀐 입찰규정과 관련해 고속차량 특수성이 간과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코레일은 당시 현대로템으로부터 입찰규정과 관련해 어떤 의견도 전달받은 바 없다고 반박했다. 현재 코레일은 입찰기준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감사원에 사전컨설팅을 신청했으며, 외부기관의 자문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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