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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발견통보' 눈감은 통일부…피살뒤 매뉴얼 슬그머니 개정

중앙일보

입력

통일부가 서해 공무원 실종 다음 날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발견 통보를 받고서도 매뉴얼대로 구조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지적받은 그 매뉴얼을 지난해 초 슬그머니 개정한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군 역시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내용이 포함된 매뉴얼을 제정했다. 통일부·국방부 관계자들은 검찰 수사에서 일제히 “공무원 피살 당시 매뉴얼 부재로 대응이 어려웠다”는 취지로 변명한 것으로 파악됐다.

감사원이 13일 발표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감사 결과에 따르면, 통일부는 서해어업지도관리단 소속 이대준씨 실종 이튿날인 2020년 9월 22일 오후 6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발견 정황을 최초로 전달받은 뒤에도 매뉴얼 등에 따른 위기대응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 감사원은 “(통일부가 국정원과) 수차례 통화하면서 ‘이씨가 해상 부유물을 잡고 표류 중이며 구조활동 정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된다’는 등의 상황을 파악했다”며 “북한 내 우리 국민의 억류·위해 등이 발생하면 주관기관으로서 유관기관에 상황을 전파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송환에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는데도 통일부는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통일부가 2020년 9월 22일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당시 적용하지 않았다고 지적돼 온 대응매뉴얼을 지난해 1월 비공개로 개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은 지난 7월 27일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통일부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동안 취재진이 몰여 있는 모습. 뉴스1

통일부가 2020년 9월 22일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당시 적용하지 않았다고 지적돼 온 대응매뉴얼을 지난해 1월 비공개로 개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은 지난 7월 27일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통일부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동안 취재진이 몰여 있는 모습. 뉴스1

국민의힘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사건 진상조사 태스크포스(TF)’(위원장 하태경)가 지난 7월 5일 발표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통일부는 2018년 4월 ‘북한 관할 수역 내 민간 선박·인원 나포 대응매뉴얼’(이하 대응매뉴얼)을 제정했다. 이 매뉴얼에는 ‘상황 발생 시 신속하게 유관기관에 상황을 전파하고, 대변인 브리핑 등을 통해 북한에 즉시 통지’하도록 명시돼 있다. 하지만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발생 당시 통일부 담당 국장은 국정원으로부터 오후 10시쯤 추가적인 상황파악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은 후 상황을 종료했다. 이인영 전 장관, 서호 전 차관에게도 관련 상황을 보고하지 않은 채 오후 10시 30분쯤 퇴근한 것으로 조사됐다.

통일부는 2020년 10월 조태용(현 주미대사) 당시 국민의힘 의원 측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발생 당시 대응매뉴얼을 적용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이씨가 선박에 타고 있는 상태로 실종된 게 아니라서 매뉴얼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이후 통일부는 이듬해인 지난해 1월 해당 매뉴얼을 ‘민간 선박·인원이 북한 수역 내에서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북측 수역으로 이동·표류할 가능성만 있으면 유관기관에 상황을 전파하고 북한에 통지한다’는 취지로 슬그머니 개정했다. 군 역시 비슷한 시기 유사한 내용을 포함한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사건 관계인들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같은 매뉴얼 제·개정 이전에는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매뉴얼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대응이 어려웠다는 취지로 해명했다고 한다.

청와대의 실종 공무원 북한 피격 사건 대응 일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청와대의 실종 공무원 북한 피격 사건 대응 일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 여권 관계자는 “당시 북한 수역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정황을 알고도 손을 놓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모든 게 매뉴얼 탓인 양 몰래 개정하는 방법으로 알리바이를 만든 건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통일부는 2020년 9월 24일 장관 주재 간부회의를 거쳐 최초 상황 인지 시점을 2020년 9월 22일 오후 6시에서 9월 23일 오전 1시로 마음대로 바꿔 국회·언론 대응자료를 작성·제출하기도 했다. 23일 오전 1시는 이씨가 이미 북한군 총격에 사망, 시신이 소각된 이후이자 이인영 전 장관이 최초 인지한 때다.

한편, 2020년 9월 22일 이같은 국민 구조 매뉴얼이 정상 가동하지 않는 동안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은 청와대 내부망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에 서면으로 보고한 뒤 오후 7시 30분쯤 퇴근했다. 임기가 당일 자정까지였던 박한기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오후 5시 30분쯤 보고를 받고도 오후 7시 이전에 퇴근했고, 후임이었던 원인철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오후 8시 이후 두 차례 보고받았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이인영 전 장관은 그 시각 저녁 만찬 일정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사실상 지휘부 공백 속에 이대준씨는 북한군 밧줄에 연결된 채 해상에서 표류하다 다시 실종, 약 1시간 10분 만에 북한군에 다시 발견됐고 같은 날 오후 9시 40분 쯤 피격돼 사망했다. 북한군은 이후 이씨 시신을 해상에서 소각한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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