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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김수근 굴욕 안겼다…부여를 흔든 '왜색 논쟁' 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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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세기 전 한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건물이었던 옛 국립부여박물관의 모습.          한은화 기자

반세기 전 한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건물이었던 옛 국립부여박물관의 모습. 한은화 기자

한국 건축사에서 이보다 더 논쟁적인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 또 있을까. 완공되기 전에 철거 여론이 일어났으나 살아남았고, 형태적으로 여전히 강렬하지만 거의 잊힌 건물이 되고 말았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옛 국립부여박물관의 구설수 #비범한 설계일까, 일본식일까 #백제시대부터 이어지는 논쟁들

부여군 관북리 28-4에 위치한 구(舊) 국립부여박물관의 이야기다. 건물 아래는 잘린 채 삼각 지붕만 남겨진 것 같기도, 원시적인 오두막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한 이 건물의 건축가는 김수근(1931~1986년)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 건축가이자, 한국 건축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 원서동의 공간 사옥, 종로 세운상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서대문 경찰청, 서초동 법원 청사 등 작은 건물부터 대형 국가시설을 두루 설계했다.

1965년 건립이 추진된 박물관의 건축 면적은 707㎡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건축면적이 4만8644㎡인 것을 고려하면 규모가 아주 작다. 그런데 이 건물은 완공될 무렵 신문 톱기사를 오르내리며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건축물이 사회적인 관심을 이렇게나 받다니 유례없는 일이었다.

3층 규모의 건물인데 건물 전체가 지붕인 것처럼 보인다.                   한은화 기자

3층 규모의 건물인데 건물 전체가 지붕인 것처럼 보인다. 한은화 기자

천창이 훤히 뚫린 박물관 내부 화장실의 모습. 아름다운 화장실로도 꼽힌다.         한은화 기자

천창이 훤히 뚫린 박물관 내부 화장실의 모습. 아름다운 화장실로도 꼽힌다. 한은화 기자

명실공히 국립박물관인데 일본 신사를 닮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른바 ‘왜색 논쟁’이다. 일본이라면 치를 떨던 당시 분위기에서 왜색 논쟁은 연일 신문지상을 달구며 확대되다가 건축계의 중재로 수그러들었다. 이후 건물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완공됐다. 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93년 부여에 새 국립부여박물관이 지어지면서 잊혀졌다. 건물은 용도가 계속 바뀌며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적절한 새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옛 국립부여박물관 정도로 불리고 있다.

지난달 3일 옛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역사적 건축물의 일상성과 초월성: 舊 국립부여박물관의 미래’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옛 국립부여박물관의 과거와 오늘을 짚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건물이 지어진 지 반세기 만에 열린 공식적인 논의 자리였다.

60년대 왜색 시비 논쟁으로만 각인된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 건축의 전통 모방 논쟁까지 숱한 이야기를 짚을 수 있는 ‘한국 건축의 논쟁 종합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백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에 옛 국립부여박물관만큼 풍화와 풍파에 맞서는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해 온 건축물도 몇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신사를 닮은 국립박물관?      

박물관 정문이 일본 신사의 '도리이'와 닮았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왜색시비가 붙었다.  [동아일보]

박물관 정문이 일본 신사의 '도리이'와 닮았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왜색시비가 붙었다. [동아일보]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1967년 8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였다. ‘부여 박물관 건축양식에 말썽, 일본 신사와 같다’라는 제목의 톱 기사였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박물관의 정문이었다. 일본 신사의 정문인 ‘도리이(鳥居)’와 비슷하다는 지적이었다. 하늘 천(天) 자 모양의 큰 문인 도리이는 일본에서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관문으로 세우는데, 흔히 신사 앞에서 볼 수 있다.

실제 정문의 모습. 등나무로 가려놨다가 이후 철거된다.       [사진 안창모 교수]

실제 정문의 모습. 등나무로 가려놨다가 이후 철거된다. [사진 안창모 교수]

일본의 한 신사의 도리이. 중앙포토

일본의 한 신사의 도리이. 중앙포토

건물도 논란이었다. 건물의 지붕 끝 모양이 일본 신사의 `지기‘(千木)를 닮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는 일본 신사 건축의 특징으로 지붕 끝머리에 X자 형태로 나무가 교차하는 부분을 일컫는다. 일본 도쿄대에서 공부한 김수근의 학력과 더불어 왜색논쟁은 더 거세졌다. 결국 철거 여론이 일어났고, 당시 문홍주 문교부 장관은 “신축 중인 국립부여 박물관의 건축양식이 일본식이면 철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곧장 부여박물관의 건축양식을 조사하기 위한 심사위원회가 꾸려졌다. 14명의 심사위원은 공사현장을 답사하고 “와서 보니 도리이나 신사가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일본식 냄새가 난다는 몇몇 의원들의 의견도 있었지만, “비범한 설계” “원시적인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평가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이후 건물 지붕은 일부 수정을 거친 뒤 완공됐다. 그리고 정문은 등나무를 심어 도리이로 의심받았던 형태를 감췄다가 어느샌가 철거됐다.

옛 국립부여박물관.  한은화 기자

옛 국립부여박물관. 한은화 기자

일본 신사 건축의 특징인 '지기‘(千木)는 지붕 끝에 X자 형태의 나무가 교차하는 형태를 일컫는다. 중앙포토

일본 신사 건축의 특징인 '지기‘(千木)는 지붕 끝에 X자 형태의 나무가 교차하는 형태를 일컫는다. 중앙포토

일제가 탐냈던 땅, 관북리

알려진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백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가 더 있다. 당시 작은 박물관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됐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재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이 터의 트라우마가 작동했다”며 “국립박물관이 들어선 부여 관북리 땅은 백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60년대 왜색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중첩된 역사가 있었고, 부여박물관이 새롭게 지어졌을 때 그 연장 선상에서 형태 논쟁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했다.

부여 부소산 아래 관북리 일대는 백제 사비시기 도성 터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1980년대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됐고, 백제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됐다. 그런데 일본은 일찌감치 이 땅을 탐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대 일본과 백제의 선린관계를 주장하기 위해 부소산 일대가 고대 일본인이 오래전에 활동했던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부여가 내선일체 발상의 성지이자, 아스카 문화의 원천지라고 주장하며 관광사업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북리 일대에 신사를 짓고, 총독부 부여박물관을 만들었고, 공원조성 계획과 부여신궁 건설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예민한 역사를 품은 땅에 일본 신사를 닮은 듯한 국립박물관이 지어진다고 하니 여론이 더 들끓었던 것이다.

백제 유적 발굴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부여박물관 주변에 건물이 빼곡했다.    [사진 부여군]

백제 유적 발굴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부여박물관 주변에 건물이 빼곡했다. [사진 부여군]

백제 유적 발굴로 부여박물관을 제외한 대다수 건물이 철거된 현재의 모습.

백제 유적 발굴로 부여박물관을 제외한 대다수 건물이 철거된 현재의 모습.

국립부여박물관이 새 건물로 이전한 뒤 이 건물은 계속 용도가 바뀌다 2005년 또다시 철거 위기에 놓일 뻔했다. 고고학계에서 백제 유적을 완전히 찾기 위해 건물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다. 결국 건물 아래에는 관련 유적이 없을 것으로 추정돼 흐지부지됐지만, 박물관 건물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현재 건물은 백제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으로 쓰인다. 김 교수는 “결국 수없이 중첩된 여러 이야기는 사라지고, 백제왕궁으로서의 집단적 기억만 남겨 놓은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 건축의 전통 논쟁  

전통 건축은 현재 한국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우리는 전통을 단순히 모방하고 있을까, 전통을 해석해 새로운 창조의 길로 가고 있을까. 국립부여박물관은 이 논쟁과 함께 늘 거론된다. 건물이 건립될 당시인 1960년대는 폭발적인 경제성장기로 국가 주도의 건축 프로젝트가 많았다. 당시 정권에서는 체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건축을 모방하라고 대놓고 요구하기도 했다.

‘문화재로 화석화된 한국 건축학’의 탄생 배경이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한국의 전통 논쟁은 근대화 과정의 서구처럼 극복과 타도의 대상으로서의 전통이 아니라 외부 세력의 목적 지향적 근대화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듬고 나가야 하는 대상이었다”며 “일본 강점기 때는 국가를 빼앗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마지막 보루가 전통이었고, 유신체제 때 새마을 운동을 하며 전통을 낡은 폐습이라고도 하면서도 체제 유지를 위해 전통계승을 강조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경복궁 옆 국립민속박물관의 모습. 한국의 전통건축물 9곳을 짜깁기해 지었다. 중앙포토

경복궁 옆 국립민속박물관의 모습. 한국의 전통건축물 9곳을 짜깁기해 지었다. 중앙포토

전통 계승을 빙자한 모방의 대표적인 사례로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옛 국립종합박물관)이 꼽힌다. 1966년 공모 설계 당시 정부는 “건물 그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 여러 동의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정인하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법주사의 팔상전을 비롯해 9개의 전통건축을 디테일까지 묘사해 콘크리트로 재현시킨 안이 당선되자 건축계는 논란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이 추진된 국립부여박물관은 이렇게 전통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왜색 시비에 휩싸였고, 김수근 건축가는 이후 칼을 갈듯 한국건축과 한국성에 대해 공부한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 사옥(1971~1977년)은 그 대표작으로 꼽힌다. 마치 한국 전통 건축의 흐름처럼, 비워내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간 구성이 빼어나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굴욕적이었던 사건을 자양분 삼아 진일보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김수근은 대단한 건축가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사옥의 모습.  중앙포토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사옥의 모습. 중앙포토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옛 국립부여박물관의 이름은 앞으로 무엇이어야 할까. 건물은 어떤 용도로 쓰여야 할까. 안창모 교수는 “부여국립박물관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어떤 유산도 담아내지 못한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어 앞으로 활용방안을 연구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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