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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K클래식 스타] 중·일 국가가 스타 성악가 띄워, 한국은 데뷔 후 ‘맨땅에 헤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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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13면

SPECIAL REPORT

지난해 메트오페라 ‘마술피리’로 주역 데뷔한 소프라노 박혜상. [사진 크레디아]

지난해 메트오페라 ‘마술피리’로 주역 데뷔한 소프라노 박혜상. [사진 크레디아]

‘K클래식’을 21세기 한국인이 거둔 국제 콩쿠르 결과와 분리해 논하긴 어렵다. ‘J팝’ ‘K팝’처럼 콘텐트를 제작하는 산업적 역량을 통칭하는 용어와 달리, ‘K클래식’은 작품을 재연하는 개인의 실적을 종합해 클래식 분야의 정책적 지원을 역추적하는 의미가 크다. 국제 콩쿠르는 다양한 교육 배경의 젊은 연주자를 국적으로 분류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클래식의 글로벌화를 진전시켰다. 특히 비유럽 출신이 우승하면 콩쿠르의 국제성이 강화된다는 인식 때문에 한국, 일본, 중국 참가자가 메이저 경연에서 우승하면 우승자에 대한 국제 공연 시장의 관심도 치솟았다. 21세기 들어 한중일 연주자들의 저명 콩쿠르 입상이 본격화됐고, 동북아 3국간 경쟁도 뜨거워진 이유다.

‘K클래식’이 급부상한 건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부터다. 남녀 성악 1위(베이스 박종민, 소프라노 서선영), 피아노 2·3위(손열음, 조성진), 바이올린 3위(이지혜)에 한국인이 대거 입상하자 일본 음악계는 바짝 긴장한다. 2010년대 국제 콩쿠르 세계 연맹(WFIMC) 피아노 경연 통계에서 일본은 러시아, 한국에 이어 입상자 수가 3위로 밀렸다. 2009년 하마마츠 콩쿠르 우승자 조성진이 2015년 쇼팽 콩쿠르를 제패하자 “한국을 익히자”는 태도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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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이 실제로 더 부러워하는 건 한국 성악 인재들의 질과 양이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 차이콥스키 콩쿠르 바이올린(1990년 스와나이 아키코, 2007년 카미오 마유코), 피아노(2002년 우에하라 아야코) 부문에서 우승자를 배출했지만, 오페라에선 동양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반면 한국은 바리톤 최현수(1990년)에 이어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남성 우승자가 탄생했다.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역시 일본은 바이올린(1980년 호리고메 유즈코, 1993년 토다 야요이) 우승자만 배출했지만, 한국은 성악 우승자(2011년 홍혜란, 2014년 황수미)를 연달아 냈다. 일본 음악계는 기악 분야에선 교수법 개량으로 한국을 견제할 수 있지만, 한국 성악가들에겐 교육으로 성취하기 어려운 태생적 우월성이 있는 것 아니냐며 우리 성악가들의 도약을 주시하는 분위기다.

사실 같은 ‘세계 3대 콩쿠르’라 해도 기악과 성악 우승자를 대하는 국제 시장의 차별은 극명하다. 쇼팽 콩쿠르를 우승하거나, 바이올리니스트가 차이콥스키·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우승하면 쉽게 스타덤에 오른다. 반면 차이콥스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성악 우승자는 오페라하우스의 최고봉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국립 오페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에 바로 캐스팅되지 못한다. 메이저 경연에서 우승해도 20대의 소리는 프로 사이에서 여전히 풋사과 취급을 받는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소리를 숙성해야 거장으로 거듭나는 오페라 질서의 불문율 아래 성악 시장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여 ‘K 클래식’의 열광 이면에 세계 정상급 실력의 한국 청년 성악도는 국내외로 양질의 공연에 굶주려 있는 실정이다.

뮤지컬 ‘엘리자벳’에 출연중인 베이스바리톤 길병민.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엘리자벳’에 출연중인 베이스바리톤 길병민.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우리 성악가들의 성과를 따져보면 놀랄 만하다. 2017년 기준 WFIMC 산하 148회 대회의 한국인 우승 가운데 피아노가 42회, 성악이 40회를 차지했다. 빌바오 성악 콩쿠르에선 1996년~2012년 사이 한국인 우승자가 일곱 명이 나와 화제가 됐고, 1990년대는 조수미의 시대였다. 독일권 궁정가수 칭호를 얻은 헬렌 권, 전승현, 연광철, 사무엘 윤, 바이로이트 축제에 나간 김석철,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오른 김우경, 이용훈, 박혜상 등은 성악가로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과는 순전히 현지에서 맨몸으로 싸워 얻은 것이다. 반면 일본의 메조소프라노 후지무라 미호코가 유럽 저명 오페라 극장을 석권하고, ‘중국판 쓰리 테너’ 웨이 송, 워렌 목, 다이 위치앙이 탄생한 것은 ‘국가대표 아티스트’를 띄우는 모종의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다. 일본 대기업이 후지무라가 참가하는 프로덕션을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자국 아티스트에게 물량 공세를 퍼붓는 중국 시장을 겨냥해 EMI가 다이 위치앙의 신보를 제작하는 식이었다.

한국 성악가들도 이탈리아 등 현지 오페라 하우스에 등장해 개성적인 음색을 인정받곤 한다. 하지만 데뷔 이후가 문제다. 백화점식으로 운영되는 현지 성악 에이전시가 굳이 한국인 성악가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케팅에 적극적인 에이전시를 만나기란 로또 당첨격이다. 2014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5위였던 소프라노 박혜상은 유니버설 뮤직 A&R 출신이 설립한 부틱 매니지먼트와 만난 이후, 유럽과 미주 오페라 활동에 날개를 달았다. 한편 같은 대회 우승자 황수미를 비롯해 서선영(2011 차이콥스키 우승), 홍혜란(2011 퀸 엘리자베스 우승)은 2010년대 정면 도전했던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돌아와 현재 국내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정착하는 분위기다.

세계 성악 시장의 특수성 속에서 한국인 성악가가 정착하려면 이들의 재초청을 유도할 국내 기업과 후원가 그룹의 현지 후원이 절실하다. 하지만 기악분야에서 금호문화재단이 오랜 기간 영재를 지원해 왔고, 영향력 있는 음악가들이 정책적 뒷받침을 호소해 온 것과 딴판으로 성악 분야의 공공적 지원은 공백 상태다.

2010년대 들어 유럽과 미주에 속속 개원한 재외 한국 문화원이 역할을 할 시점이다. 한국 문화원이 정부가 공인한 성악의 인력풀을 현지 주요 거점 극장에 프레젠테이션할 기회만 얻더라도 한국 성악도들은 큰 힘을 얻을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 성악 전공자들이 쏠리는 무대는 JTBC ‘팬텀싱어’다. 2016년부터 ‘포르테 디 콰트로’ ‘포레스텔라’ ‘라포엠’ 등 남성 4중창팀을 구성해 팬덤을 형성한 뒤 크로스오버 콘서트 시장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오페라 전막 공연이라면 공연 후 최소 3일간 휴식이 필수지만, 크로스오버팀은 마이크 힘을 빌어 연말에는 하루 서너 차례 스케줄도 너끈하다.

이미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에A’ 리그급 극장을 주역으로 섭렵한 바리톤 김주택이나 2019년 로열 오페라 신인 양성 플랜에 이름을 올렸던 베이스바리톤 길병민을 한국 정규 오페라 극장에서 보기 어렵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양질의 성악자원이 오를 수준 높은 오페라 무대가 국립오페라, 대구 오페라하우스를 빼면 없는 탓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예정대로 2024년 개관하고 예술의전당이 과거처럼 자체 전막 오페라를 만들거나 서울시오페라단이 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에 투자한다면 ‘K클래식’은 정통 성악에서도 르네상스를 맞을 것이다.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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