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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서 웨딩드레스 입고, 월악산서 붓질하고…무슨 일이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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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16면

‘산의 날’ 20주년 앞둔 진풍경

결혼을 앞둔 이제성·양지원씨가 14일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북한산 영봉에 올랐다. 꽃이 된 캠을 들고 자일을 어깨에 걸친 두 사람 뒤로 인수봉이 보인다. 이들은 이날 인수봉까지 올랐다. 정준희 기자

결혼을 앞둔 이제성·양지원씨가 14일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북한산 영봉에 올랐다. 꽃이 된 캠을 들고 자일을 어깨에 걸친 두 사람 뒤로 인수봉이 보인다. 이들은 이날 인수봉까지 올랐다. 정준희 기자

인수봉에 웬 웨딩드레스? 우리나라 암벽등반 1번지 정상에서 등산복 아닌 예복을 차려입다니. 이 커플이 수상했다.

이제성(32)·양지원(26)씨는 내년 봄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이씨는 “(우리가) 바위에서 만나 바위에서 결실을 본다는 의미로 기념사진을 찍으러 왔고 바위에서도 해로할 것”이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들의 도우미로 나선 임동균(51)씨는 “별의별 등반도 다 해본다”며 웃었다. 평일임에도 인수봉에 오른 다른 사람들도,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건너편 백운대(836m)에 오른 이들도 “축하해요”라고 외쳤다. 양씨는 “못 잊을 결혼선물을 받았다”며 눈물을 엷게 띄웠다.

단풍 산행 좋은 10월 18일 산의 날로 정해

“인수봉 결혼식? 그거 나도 해봤죠.” 북한산 도선사 근처에서 만난 장정일(51)씨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선배의 결혼식을 기획했는데, 하객이 되는 다른 등반객 수십 명에게 줄 떡·과일·고기를 짊어지고 오르느라 고생을 꽤 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인수봉은 암벽등반장과 결혼식장으로 동시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 지난 14일, 4400개에 이르는 우리나라 산의 한 풍경이었다.

2014년 4월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서 멀티암벽회 소속 박모씨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이 결혼식을 기획한 장정일씨는 당시 하객이 30여명이라고 말했다. [사진 장정일]

2014년 4월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서 멀티암벽회 소속 박모씨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이 결혼식을 기획한 장정일씨는 당시 하객이 30여명이라고 말했다. [사진 장정일]

오는 18일은 ‘산의 날’이다. 산림청이 제정한 지 만 20년이 됐다. 성인이 되는 ‘산의 날’을 앞두고 산의 갖가지 풍경을 찾아갔다.

“몽실몽실하니, 넉넉하고…좋은 말 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더이만.” 경남 고성에서 온 김귀덕(55)씨가 지난 9일 백운대를 다녀오면서 한 말이다. 비가 제법 내린 날임에도 김씨는 “100대 명산에 도전하느라 멀리 남쪽에서 달려왔다”고 밝혔다.

김씨가 말한 ‘100대 명산’은 ‘산의 날’을 만들면서 추려냈다. 산림청은 유엔의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계기로 10월 18일을 ‘산의 날’로 지정했다. 18일로 꼽은 이유는 십(十)과 팔(八)이 합쳐져 나무(木)가 되는데, 절기상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와 겹쳐 선선하고 단풍이 들어 산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이다. 유엔은 2003년에 12월 11일을 ‘국제 산의 날’로 정했다. 이웃 일본은 2014년에 8월 11일을 ‘산의 날’로 정하면서 공휴일로 만들었다.

지난 5월 월악산 제비봉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강은씨. 정준희 기자

지난 5월 월악산 제비봉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강은씨. 정준희 기자

이런 100대 명산을 찾아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있다. 지난 5월 21일, 김강은(32)씨는 작은 스케치북과 팔레트·붓을 챙겨 월악산 제비봉으로 향했다. 20분 만에 ‘작품’이 탄생했다. 그는 “사실 100대 명산은 산림청이 정한 것도 있지만 내가 정한 것도 있다”며 “동네 뒷산도 내게는 명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벽화가라고 자신을 밝힌 김씨는 “멈춰야 할 곳을 알 수 있고, 정상에 꼭 가야 한다는 압박감 대신 자유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에 산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산을 지키느라 사선을 오가는 사람도 있다. 화마와 사투를 벌이는 진화대원이다. 산림청은 2020년 산림기본통계에서 우리나라 산림 면적은 2020년 말 기준 전체 국토 면적의 62.6%인 629만㏊라고 밝혔다. 산림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핀란드(73.7%), 스웨덴(68.7%), 일본(68.4%)에 이어 4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3월 동해안에 최악의 산불이 일어났다. 산림 2만923㏊가 불에 탔다. 피해를 본 나무는 2000만 그루에 이른다.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소속 공중진화대원들이 지난 5월 31일 밀양시 부북면 일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며 야간 산불을 진화 하고 있다. [사진 산림청]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소속 공중진화대원들이 지난 5월 31일 밀양시 부북면 일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며 야간 산불을 진화 하고 있다. [사진 산림청]

당시 산불 진화에 나선 손병혁(28) 공중진화대원은 "민가와 원전을 사수하느라 밤낮을 가릴 새도 없었다"고 밝혔다. 산불 진화 헬기를 몬 정준호(44) 기장은 “일출에 맞춰 뜨고, 일몰 따라 내려오는 날이 이어지며 힘들긴 했지만, 우리가 포기하면 모두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며 버텼다”고 말했다.

산림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은 4400개다. 산으로 분류될 만한 자연지명은 8006개로 집계되지만, 이 가운데 재·치·고개 등 지리적 성격상 산과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을 제외한 수치다. 이름은 같지만, 산은 다른 ‘동명이산’도 많다. 전국의 산 이름 중 가장 많이 쓰이는 명칭은 ‘봉화산’으로 47개나 된다. 국사봉(43개)·옥녀봉(39개)·매봉산(32개)·남산(31개)이 뒤를 잇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국사봉은 해발 108m의 ‘뒷산’이다. 코로나19로 실내체육시설 출입 제한 조처가 내려지면서 뜬 곳이다. 이른바 ‘산스장(산속 헬스장)’으로 주민들이 몰렸는데, 실내체육시설 제한이 풀린 지 한참 지난 현재까지도 ‘성업’ 중이다. 지난 10일 배모(24)씨는 “실내 헬스장이 문을 닫자 ‘근 손실 될라’며 처음 찾았다가, 산속에서 달콤한 공기 맡으며 운동하는 재미가 쏠쏠해 매주 한 번 이상은 찾는다”고 말했다.

직장 동료였던 서혜민(25)·김혜원(25)씨는 ″마음 속의 고요를 찾으러 왔다″며 비가 내린 지난 10월 9일 북한산 중흥사 템플스테이에 들어가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직장 동료였던 서혜민(25)·김혜원(25)씨는 ″마음 속의 고요를 찾으러 왔다″며 비가 내린 지난 10월 9일 북한산 중흥사 템플스테이에 들어가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의외로 좋네요. 비 오는 날의 산은….” 지난 9일 20대 여성 8명이 북한산 대서문과 중성문을 지나 중흥사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한다고 했다. 서혜민(25)씨는 “실내 클라이밍만 하다가 지난주 북한산 원효봉에 올랐는데, 결국 리얼(진짜) 산이 주는 힐링에 빠져버려 템플스테이도 신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곧이어서 레깅스 복장의 20대 여성들이 북한산성 대동문 방향으로 넘어갔다.

산 4400개, ‘동명이산’ 봉화산 47개 최다

최근 이런 젊은 여성들이 산에서 많이 보이는 이유가 통계로 증명됐다.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가 2021년 12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이상 산을 찾는 ‘등산인구’는 1603만 명(19~79세 중)이다. 60대 이상의 S세대가 34.3%로 산을 가장 많이 찾고 있지만, 산에 젊은 층(20·30대 27%) 유입은 늘었다. 등산인구 중 최근 2년 새 등산을 시작한 사람들이 22%에 이르는데, 여성(26%)이 남성(18%)보다 많다. 또 등산인구 중 20대의 55%가 최근 2년 새 등산을 시작했다. 30대는 40%로 2위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이처럼 ‘산린이(등산하는 어린이)’를 자처하는 MZ세대가 늘면서 그들이 등산복으로 즐겨 입는 레깅스도 떴다. 요가·필라테스, 자전거 라이딩 등 실내외 운동을 가리지 않고 일상복으로도 파고들었다. 이에 힘입어 애슬레저 기업 안다르의 지난 2분기 매출액은 541억원으로 1분기 대비 두 배 가깝게(99%) 올랐고, 영업이익은 57억 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산을 찾는 계기도 40대 이상은 ‘주변의 권유’가 다수였지만, 2030은 ‘혼자 가보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많았다.

'산린이' 또는 '등린이'로 스스로를 부르는 2030 등산객들이 북한산 백운대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2030의 독특한 산행 패션인 레깅스 차림이다. 김홍준 기자

'산린이' 또는 '등린이'로 스스로를 부르는 2030 등산객들이 북한산 백운대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2030의 독특한 산행 패션인 레깅스 차림이다. 김홍준 기자

이에 대해 최중기 한국산악학회 회장(인하대 명예교수)은 “코로나19로 활동이 제한된 젊은층이 자연에서 대안을 찾고, 산이 주는 신비와 감흥을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인과의 교감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2030이 산을 찾는 이유도 다소 추상적이지만 이런 ‘존재론적’ 경험과 사유가 작용하지 않나 본다”고 밝혔다. 한국산악학회는 지난 9월 23일 창립 학술대회를 열었다.산과 등산에 관해 연구하는 모임은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하다. 하지만 최 회장은 “레깅스 차림의 MZ세대가 산으로 향하는 건 현상이자 문화”라며 “산과 관련된 문화와 예술·학술, 심지어 응급상황에 대비한 의술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산을 대하면 산이 보다 풍족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등산 문헌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한국산서회, 해외 등산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하루재북클럽 등도 있다. ‘학교’도 있다.

지난 10월 초 서울 도봉구 도봉산에서 한국등산학교 '학생'들이 등산강사의 지도로 암벽 등반 교육을 받고 있다. [사진 남궁우석]

지난 10월 초 서울 도봉구 도봉산에서 한국등산학교 '학생'들이 등산강사의 지도로 암벽 등반 교육을 받고 있다. [사진 남궁우석]

남궁우석(51)씨는 한국등산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의 여자친구 이모(42)씨는 코오롱등산학교를 나왔다. 48년 역사의 ‘한등’과 37년 된 ‘코등’은 은연중에 라이벌이 됐다. 강사진, 교육프로그램을 놓고 남궁씨와 이씨는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국립’등산학교도 있다. 정승권등산학교·CAC등산학교 등도 10월 졸업시즌을 맞이했다. 산의 날이 낀, 산에 가기 가장 좋다는 계절이다. 남궁씨가 오는 16일 졸업식이 열리는 도봉산으로 향하면서 말할 것이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이해와 보호의 경각심을 깨우는 산은 베품터이자 배움터이다.

쓰레기 줍는 클린 하이커스, 국내서 첫 국제 산악보호상

소셜네트워크 기반의 국내 친환경 아웃도어 단체가 국제산악연맹(UIAA) 산악보호상(Mountain Protection Award) 2위를 수상했다. 전국을 하이킹하며 쓰레기를 줍는 ‘클린 하이커스’다. 국내 단체가 UIAA 산악보호상을 받는 건 처음이다. 1위에는 인도네시아 FPTI팀의 ‘린자니 구하기 프로젝트’가 선정됐다. 활화산인 린자니의 훼손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프로젝트다.

하이킹을 하며 자연 정화 활동을 하는 클린하이커스 회원들이 2021년 4월 11일 영남알프스에서 수거한 쓰레기로 '정크아트'를 만든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김강은]

하이킹을 하며 자연 정화 활동을 하는 클린하이커스 회원들이 2021년 4월 11일 영남알프스에서 수거한 쓰레기로 '정크아트'를 만든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김강은]

클린 하이커스는 상금 4000유로(약 550만원)를 받는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3만7000여 명의 김강은(32) 클린 하이커스 대표는 “약 5년간 2000명의 회원이 2.1t의 쓰레기를 수거한 것 같다”며 “산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해 주는 만큼, 우리도 산을 깨끗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클린 하이커스는 어떻게 태어났나.
“2018년 1월, 지리산 대피소 취사장에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깨끗하고 건강한 산행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회원이 꽤 많다.
“현재까지 누적 참여자가 약 2000명이다. 5년간 총 150여 회 산과 바다·들로 나가 쓰레기 약 2.1톤을 수거했다. 성인용품·유모차·세탁기도 거뒀다.”
클린 하이커스의 목표는.
“산악보호상 수상을 계기로 기후 위기를 극복할 글로벌 프로젝트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수거할 쓰레기들이 사라져, 그야말로 산과 들이 깨끗해져 클린 하이커스가 해체되는 것이다.”
상금은 어디에 쓰나. 
"정크아트 전시회를 여는 데 쓸 계획이다. 정크아트는 폐품이나 일상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들을 모아 스토리를 입히는 예술의 한 장르다. 쓰레기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대중에게 일깨우고, 클린 하이커스의 환경 놀이문화 동참을 이끌기 위해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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