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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여우에게 ‘어린 왕자’를 읽어준 나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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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20면

여우와 나

여우와 나

여우와 나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북하우스

여우는 매일 오후 4시 15분쯤 찾아왔다. 저자는 외딴 오두막 밖에서 여우를 기다렸다가 책을 읽어줬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배경에는 음악도 흐른다. 아니, 음악이 아니라 멀리 지빠귀 소리다.

마치 동화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 저자의 삶과 실제 경험을 담은 논픽션 『여우와 나』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고로 저자는 생물학 박사인데, 그가 ‘우리 여우’라고 부르는 이 여우와 만난 것은 그의 전공이나 연구와는 관련이 없다.

책에 가끔 드러내는 개인사에 따르면, 저자는 폭력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다가 열다섯 살에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대학 시절 그에게 학자금 대출 서류에 서명하게 하고는 그 돈마저 가져가 버렸다. 졸업 후 미국 여러 국립공원에서 레인저 등으로 일한 그는 동물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어렵사리 박사학위까지 받지만, 도시의 삶은 지치고 숨 막혔다. 그는 자연으로 향했고, 결과적으로 안정적 생활 대신 정서적 안정을 찾은 셈이 됐다. 미국 몬태나주 로키산맥 자락에서 통나무집을 빌려 살다가 땅을 찾았다. 대출을 받아 땅을 사고 또 대출을 받아 집을 지었다.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도 50km 떨어진 곳,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곳이다.

미국 몬태나주 로키산맥 자락에 자리한 저자의 외딴 오두막을 찾아온 여우. 저자는 이 여우를 ‘우리 여우’라고 부른다. [사진 북하우스]

미국 몬태나주 로키산맥 자락에 자리한 저자의 외딴 오두막을 찾아온 여우. 저자는 이 여우를 ‘우리 여우’라고 부른다. [사진 북하우스]

정작 이 책에서 저자는 야생의 자연을 마냥 예찬하지도, 자연이 위로가 되었노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외롭다고 느끼진 않아도 늘 외톨이로 살아온 그는 땅에 속하고 싶었다는데, 땅은 결코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억센 잡초가 우거진 것은 물론이고,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짐승들은 “텃세”를 부렸다. 또 “무시”는 동물들을 묘사하며 그가 곧잘 쓰는 표현이다. 동물들은 자신들을 관찰하는 저자를 종종 무시한다. 어쩌면 인간의 구경거리도, 애완용도 아닌 동물에게는 자연스러운 태도일지 모른다.

그러니 여우와 친구가 되는 것은 여우에게도, 저자에게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기를 삼가곤 한다. 동물을 인간처럼 대하는 이른바 ‘인격화’가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어른에게는 비과학적이고 미성숙한 행동, 더구나 현장학습을 나온 수강생들에게 자연사를 강의하는 저자 같은 사람에게는 “감상적이고 꼴사나운 짓”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내심 여우가 더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오지 않으면 찾아 나서곤 한다. 한편으로 저자는 우리가 반려동물, 달리 말해 인간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동물에 대해서는 인격화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체험은 야생동물과 인간 사이에 우리가 그어놓은 구분 선에 종종 물음표를 던진다. 국립공원에서 일하던 시절, 저자는 야생에서 상처 입고 죽어가는 어린 동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 상황에 반발했다. 이 오두막에 살면서는 달걀노른자를 밖에 내놓아 까치 같은 단골들이 찾아와 먹게 한다. 이는 저자가 흰자만 먹기 때문에 하는 행동인데, 상식과 달리 야생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애써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생을 인간의 간섭 없이 야생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시각이 극단화한 사례 등을 들며 저자는 이렇게 비판한다. “마치 한쪽에 인간이 있고 반대쪽에 야생동물이 있는 시소를 탄 것처럼 우리는 자연적인 삶에서 멀어질수록 야생동물을 자연적 삶 쪽으로 억지로 몰아붙인다. 동물에게 자연적 삶을 강요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책에는 『어린 왕자』만 아니라 『모비딕』 얘기가 자주 나온다. 저자는 특히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고래를 찾아 나선 이슈마엘에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저자에 따르면  『모비딕』 은 미친 선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과 야생동물을 사랑하고 아메리카들소의 멸종을 애달파하는 외톨이의 일기”다. 저자에 따르면 그도, 이슈마엘도 “세상을 인간과 인간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저자는 야생동물과 가축의 구분이 인간 아닌 동물에만 통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도 야생동물 같은 유형, 가축 같은 유형이 있다는 얘기다. 또 일찌감치 여우를 연구한 학자의 주장을 근거로 저자는 인간과의 교류를 원하는 소수의 여우가 있고, 사람 역시 여우와의 교류를 원하는 유전적 성향을 타고난 소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초반부터 저자의 관점만 아니라 여우의 관점에서 주변의 상황과 풍경을 묘사하곤 하는데, 이는 아마도 저자의 관찰이 바탕인 듯싶다. 야생의 동물과 식물에 대한 풍부한 관찰을 저자는 개성이 뚜렷한 문장으로 전한다. 다만 야생은 낯설고 도시는 낯익은 독자로서 솔직히 말하자면, 저자가 애용하는 배낭의 브랜드라면 몰라도 북미 대륙 여러 동식물의 이름이 쉽게 머리에 저장되진 않는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문해력이 낮은 독자에게도 이 책은, 특히 저자의 문장과 시각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참고로 ‘우리 여우’가 나타난 것은 저자가 이 오두막에 산 지 3년쯤 지난 2005년 무렵이다. 그 만남은 1년 넘게 이어졌다. 저자는 현재도 이곳에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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