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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서 외면 여성작가들, 스포트라이트 받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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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22면

프리즈 아트페어 2022

앤시아 해밀톤의 ‘큰 호박 No.1’이 전시된 토마스 데인 갤러리 부스.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앤시아 해밀톤의 ‘큰 호박 No.1’이 전시된 토마스 데인 갤러리 부스.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9월 초 서울 코엑스 전시장에서 4일 간 7만 여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으며 ‘프리즈 서울’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프리즈(FRIEZE) 아트페어가 본국인 런던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런던 리젠트파크에는 ‘프리즈 런던/프리즈 마스터스 2022’를 위한 대형 천막이 차려졌다. 동명의 미술평론지가 2003년 론칭한 프리즈 아트페어는 크게 ‘프리즈 런던’과 ‘프리즈 마스터스’로 나뉜다. 프리즈 런던에선 현대 미술(컨템포러리 아트)을, 프리즈 마스터스에선 BC 6000년부터 20세기 이전까지의 고미술을 다룬다.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두 개의 대형 천막 사이 드넓은 잔디밭에는 수십 점의 현대 조각이 전시되는 ‘프리즈 조각(Sculpture)’ 섹션이 펼쳐진다.

여성에 집중하다

올해 프리즈 런던에는 가고시안, 페이스, 화이트 큐브, 타테우스 로팍, 하우저 앤 워스 등의 유명 갤러리를 포함해 전 세계 42개국 164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프리즈 런던을 준비한 에바 란그렛 디렉터는 “지역적 다양성, 성별에 대한 재조명이 최근 현대 미술의 큰 흐름”이라며 “멕시코부터 스리랑카까지, 전 세계 우수 갤러리들이 최고의 작품을 준비했다”고 했다.

올해 프리즈 아트페어의 영향력과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세계 3대 국제아트페어의 하나로 불렸던 프랑스의 ‘피악(Fiac)’이 제1회 ‘아트바젤 파리’에 전시장을 내주면서 사라질 위기를 맞은 것. 때문에 프리즈와 아트바젤이 세계 2대 국제아트페어로서 지존을 가리게 됐다.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섹션에서 첫날 1000만 달러(약 144억원)에 판매된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피터 브뤼겔 더 엘더의 작품. [사진 서정민 기자]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섹션에서 첫날 1000만 달러(약 144억원)에 판매된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피터 브뤼겔 더 엘더의 작품. [사진 서정민 기자]

이에 걸맞게 프리즈는 첫날부터 판매가 활발히 이뤄졌다. 마스터스 섹션에서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피터 브뤼겔 더 엘더의 작품이 1000만 달러(약 144억원)에 판매됐고, 런던 섹션에선 흑인 인물화로 유명한 미국 화가 케리 제임스 마샬의 작품이 600만 달러(약 86억3000만원)에 판매됐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단독부스로 준비한 영국화가 제이드 파도유티미의 일곱 작품은 전시초기 ‘완판’ 됐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단독 부스로 소개한 영국 여성 작가 제이드 파도유티미의 작품들.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가고시안 갤러리가 단독 부스로 소개한 영국 여성 작가 제이드 파도유티미의 작품들.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실비아 스노우덴. Miss Lesie Mae. 1982. Acylic and oil pastel on Masonite. 121.9 x 121.9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Franklin Parrasch Gallery.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실비아 스노우덴. Miss Lesie Mae. 1982. Acylic and oil pastel on Masonite. 121.9 x 121.9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Franklin Parrasch Gallery.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한편,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마스터스 섹션에선 특별한 기획전시가 화제를 모았다. ‘스포트라이트’ 섹션에서 20세기 여성작가들로만 구성된 기획전을 연 것. 마스터스 섹션 디렉터인 나단 클레망 길레피스는 “최근 미술계에선 여성작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며 “비영리재단 어웨어(AWARE·Archives of Women Artists, Research, and Exhibitions·여성작가 연구 전시 아카이브)의 창립자 카밀 모리노와 함께 26명의 여성작가전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나이키 데이비스-오쿤다예. Animal World. 1968. Embroidery. 78.7 x 68.6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o Gallery.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나이키 데이비스-오쿤다예. Animal World. 1968. Embroidery. 78.7 x 68.6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o Gallery.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메리 코스. Cold Room (detail). 1968-2017. Courtesy of PACE.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메리 코스. Cold Room (detail). 1968-2017. Courtesy of PACE.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카밀 모리노는 2009년 퐁피두센터 큐레이터로 근무하던 당시 여성작가로만 이뤄진 전시 ‘엘르(Elle)’를 개최해 250만명의 관람객을 모은 바 있다. 모리노는 “퐁피두센터에는 여성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소장됐지만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며 “미술사가 남성작가 위주로만 쓰이고 있는 게 아쉬워 퐁피두센터를 그만두고 여성작가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현재 모리노와 AWARE가 발굴·연구한 전 세계 여성작가는 950명이다. 그중 1900년부터 1951년까지 태어난 26명의 작가를 이번 스포트라이트 섹션에서 소개했다. 모리노는 “교육 기회도 적고, 정치적으로도 외면 받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여성작가들을 존경한다”며 “재조명된 그들의 작품을 만나면서 미술사의 새로운 흐름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스포트라이트 섹션에는 국제갤러리가 준비한 한국 작가 최욱경씨의 작품도 전시됐다.

독자적인 추상표현 조형양식이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필치를 통해 드러나는 최욱경의 '무제'(연도 미상)'를 출품한 국제갤러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작가의 추상회화와 콜라주로 구성된 컬러 작업, 그리고 잉크 드로잉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며 시대적 한계에 맞서 탈관습적 실험에 매진하고 여성 작가로서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던 그녀의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중 한국 작가 최욱경의 그림.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스 2022 '스포트라이트' 섹션 전시작 중 한국 작가 최욱경의 그림.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한국에 꽂히다

‘프리즈 서울’의 성공적인 데뷔 후 프리즈 아트페어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마스터스 디렉터 길레피스는 “프리즈 서울을 진행하면서 국제아트페어로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며 “런던에서도 한국 작가를 더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싶어 마스터스 섹션이 시작되는 가장 좋은 자리에 이강소 화백의 단독 부스를 모셨다”고 했다.

프리즈 마스터즈 2022 전시작 중 이강소 화백의 작품. From an Island, 1999. Acrylic on Canvas. 162 x 130.3 cm. Image Courtesy of Gallery Hyundai.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프리즈 마스터즈 2022 전시작 중 이강소 화백의 작품. From an Island, 1999. Acrylic on Canvas. 162 x 130.3 cm. Image Courtesy of Gallery Hyundai.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올해 프리즈 아트페어에 참가한 한국 갤러리는 현대, 국제, 조현, 바톤 네 곳이다. 그중 갤러리 현대와 국제갤러리는 런던과 마스터스 섹션, 양쪽에 모두 참가했다. 특히 갤러리 현대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강소 화백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단독 부스를 차렸다. 한자 ‘을(乙)’을 닮은 ‘오리 그림’으로 유명한 이 화백은 단 몇 번의 붓질로 무채색 캔버스 위에 오리·먹구름·빈 배 등 자연적인 소재들을 등장시켜 유유자적한 풍경을 펼쳐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업은 회화·설치·사진·비디오·조각·퍼포먼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늘 치열했다. 이번 단독 부스에선 항상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이미지로 기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거장의 발자취를 감상할 수 있었다.

LG전자가 현대 미술계 거장 토비아스 레베스거와 협업한 작품 '미로 속으로'. 143㎡ 규모의 공간을 흑백의 기하학적 패턴 조형물들로 채우고, 그 사이마다 LG 전자 롤러블 올레드 TV들을 설치했다. [사진 LG 전자]

LG전자가 현대 미술계 거장 토비아스 레베스거와 협업한 작품 '미로 속으로'. 143㎡ 규모의 공간을 흑백의 기하학적 패턴 조형물들로 채우고, 그 사이마다 LG 전자 롤러블 올레드 TV들을 설치했다. [사진 LG 전자]

LG전자가 현대 미술계의 거장 토비아스 레베르거와 협업한 부스도 주목받았다. 레베르거는 ‘위장’을 주제로 한 작품 ‘미로 속으로’를 선보였다. 143㎡ 규모의 공간 전체를 흑백의 기하학적 패턴으로 감싼 다양한 크기의 조형물들로 채우고, 그 사이마다 LG전자의 롤러블 올레드 TV들을 설치한 작품이다. 화면이 말린 채로 조형물 내 숨겨져 있다가 음악에 맞춰 모습을 드러내는 TV들은 영상과 공간이 하나가 된 듯한 착시효과를 만들면서 색다른 예술적 경험을 펼쳐놓았다. 이번 전시는 LG전자가 지속하고 있는 ‘올레드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LG전자는 올레드의 압도적인 화질과 유연한 폼팩터를 기반으로 아니쉬 카푸어, 케빈 멕코이, 배리 엑스 볼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지속적으로 협업해왔다.

페어장 밖 미술관의 열기

야외 공원에 펼쳐진 ‘프리즈 조각’ 섹션 중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 ‘블루 옐로 몽크’.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야외 공원에 펼쳐진 ‘프리즈 조각’ 섹션 중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 ‘블루 옐로 몽크’. [사진 프리즈 아트페어]

현대 미술의 본고장인 런던은 프리즈 아트페어 기간 동안 도시 전체가 미술로 물들었다. 리젠트 공원 밖 수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런던을 찾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을 위해 매력적인 기획 전시들을 일제히 시작했기 때문이다. 버킹엄 궁전의 일부인 퀸즈 갤러리에선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최근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년 동안 보관했던 영국 왕실 컬렉션 중 일부를 ‘일본: 궁정과 문화’라는 주제로 전시했다. 영국 왕실이 3세기 동안 받은 일본 보물 150여 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내셔널 갤러리는 10월 1일부터 영국 최고의 구상화가 루시안 프로이트의 대규모 회고전을 시작했다. 타테우스 로팍 갤러리에선 루마니아 현대미술가 안드리안 게니의 전시가 열리고, 페이스 갤러리에선 미국의 서정적 추상화가 샘 길리엄의 전시가 시작됐다. 프라다·몽클레르·로에베 등의 패션 럭셔리 브랜드들도 매일 밤 VIP 고객들을 위한 파티를 개최했다. 과장하면 프리즈 아트페어가 열리는 기간 동안 런던은 미술과 샴페인으로 휩싸인다.

내년 4월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감독을 맡은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 이숙경씨는 “테이트 모던 내 현대 커미션 터바인 홀의 전시는 프리즈가 열리는 주간의 월요일에 오픈한다”며 “프리즈-테이트모던 펀드를 통해 프리즈에 출품된 젊은 작가, 덜 알려진 작가의 그림도 구입한다”고 했다. 그는 “대형 아트 행사가 열리는 동안 ‘미술’이라는 주제로 공공 미술관이든 상업적인 갤러리든, 정부든 기업이든 도시 전체의 시너지 효과를 만드는 공동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미술 시장이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고, 전 세계인이 이 도시를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내년 가을 ‘키아프’와 ‘프리즈’가 협업하는 대형 국제페어가 서울에서 열린다. 이때 서울 전체가 미술로 들썩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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