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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외교·안보·국방만이라도 신사협정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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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31면

한경환 총괄 에디터

한경환 총괄 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 막말’ 논란에 이어 한·미·일 연합훈련을 둘러싼 ‘친일’ 공방으로 온 나라가 난리를 치고 있다. 특히 정치권은 연일 죽고살기식의 진흙탕싸움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상대방 매도에 혈안이 돼 있다. 한 국가의 존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막가파식 정쟁만 난무하고 있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과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마치 철천지원수 적대국들의 대표선수들인 양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 저렇게 끝도 없이 싸우고 있는가. 이러고도 국가와 국민, 국익을 들먹거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북핵 대응 한·미·일 연합훈련 등
국가의 생존권 걸린 문제에도
정치권은 막가파식 정쟁에 혈안
이래서야 운명공동체랄 수 있나

선데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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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민주당의 도를 넘는 반일프레임 공세는 즉시 멈추어야 한다. 외교·안보·국방과 관련한 연합훈련의 실질적 내용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일본은 안 된다’는 식의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7일 한·미·일 연합훈련에 대해 “극단적 친일 행위로 대일 굴욕외교에 이은 극단적 친일 국방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 대표는 또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리는 일이 실제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연일 비판하고 있다.

지금 북한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핵 공격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북한은 지난달 법제화 조치를 통해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열어 뒀다. 실제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등을 잇달아 발사하면서 도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 사용을 불사하겠다며 국제사회를 겁박하고 있는 가운데 김정은이 올라탄 격이다. 지난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는 4시간 반 넘게 군용기 위협 비행과 탄도미사일 발사, 해안 포사격 등 동시다발적 심야 도발을 감행했다. 14일 오후에도 동해와 서해에 수백 발을 포격했다. 작금의 한국 안보 상황은 대단히 엄중하다.

이런 위기에서도 한·미·일 연합훈련을 ‘극단적인 친일 행위’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현재 북한 핵을 한국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전술핵 재배치 등 동맹국인 미국의 핵 역량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잠수함 탐지 초계기 등 고성능 탐지장비를 많이 갖춘 일본과의 협력은 지금 상황에서 한국의 국방에 보탬이 됐으면 됐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는다.

일본과의 연합훈련은 윤석열 정부 들어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다. 민주당의 문재인·노무현 정부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재명 대표가 느닷없이 친일 행위 운운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건 이제 너무나 당연한 명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일본과의 군사협력 선택지를 원천 배제하는 것은 명분만 내세우는 억지일 뿐이다. 국토방위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옛 적국과도 손잡을 수 있어야 한다. 1, 2차 세계대전의 숙적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화해하고 유럽연합(EU)과 나토의 핵심 국가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독도와 교과서,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이 아직 얽혀 있는 한·일 관계가 독·불 관계와는 다른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모든 일에 반일과 죽창으로 맞설 수 있나.

일본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언제든지 맞는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미국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일본만 잡고 늘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시대착오적이다. 꽉 막힐 대로 막힌 일본과의 관계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쪽은 무엇보다 북한일 것이다.

여당의 대응은 너무나 한심하다. 국민의힘을 대표하는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며 경우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발언을 늘어놓아 빌미를 제공했다. 여당은 냉철한 논리로 야당을 설득하고 힘을 합쳐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게 스스로 설 땅을 좁히고 있다.

이처럼 여야 할 것 없이 모든 이슈와 정책을 정쟁화하는 우리 정치권의 행태에 정치혐오증은 극에 달하고 있다. 염치도 체면도, 게다가 실익도 없는 당파싸움에 국민의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권에 크게 기대할 건 없겠지만 적어도 한국의 존립이 걸린 문제, 외교·안보·국방에서만큼은 신사협정을 맺고 우리가 같은 공동체임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서로가 최소한의 금도는 지키는 맨정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같은 땅에서 같은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지 않겠나. 정치인만을 위한 외교·안보·국방 정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스웨덴에서는 집권정당 혹은 의회가 연금·국방·에너지 3개 분야 정책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스웨덴의 저녁은 오후 4시에 시작된다』, 윤승희 지음, 추수밭). 기존의 방향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만 한다. 국민이 바로 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미래이자 기본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권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개인이나 정당의 작은 이해관계를 넘어 국가 생존의 대의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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