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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일 개척단 유골 5000구 수습, 묘지 건립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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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7〉

항일의용군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마을을 초토화시킨 만주의 일본인 무장개척단. [사진 김명호]

항일의용군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마을을 초토화시킨 만주의 일본인 무장개척단.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헤이룽장(黑龍江)성 팡정(方正)현은 한동안 난리를 떨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 무장개척단원의 부인과 자녀, 노약자들이 떼로 몰려왔다. 1945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창문도 없는 창고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날이 풀려도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전염병 창궐로 픽픽 쓰러졌다. 시신을 거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들판에 버리거나 쌓아놓고 대충 소각했다. 팡정까지 오는 도중 어린 자녀들을 적당히 처리한, 사연 많은 여인들은 중국 농민과 가정을 꾸린 경우가 많았다. 자녀가 없는 중국인들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명언의 의미를 알 턱이 없었다. 반은 재미 삼아 일본 애들을 입양했다.

중 농민과 결혼한 일 여인, 현정부에 편지

1946년 11월, 귀국선 승선을 앞둔 일본인 고아. [사진 김명호]

1946년 11월, 귀국선 승선을 앞둔 일본인 고아. [사진 김명호]

1963년 봄 팡정의 중국 농민과 결혼한 지 17년 된 일본 여인이 남편과 산책을 나왔다. 태양과 봄바람을 즐기던 중 발에 차이는 것이 있었다. 인간의 두개골이 분명했다. 현(縣) 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전 남편은 일본개척단원이었다. 궁핍한 농촌에 태어나 배우지 못했다. 건강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만주에 가면 땅 부자가 된다는 말에 개척단원으로 자원했다. 논농사는 지어본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 중국 농민 고용해서 편하게 살았다. 가끔 군복 차림에 총 들고 나갔다. 돌아와서 천황폐하께 불충한 중국 마을을 요절내고 왔다며 의기양양했다. 그러다가 전쟁터에 끌려나갔다. 중국 산천 어디엔가 백골로 굴러다닐 것이 뻔하다. 현재 팡정현 일대에는 남편이나 부모, 자식 따라온 민간인들의 유골이 널려있다. 적당한 곳에 이들을 안장해주기 바란다.”

1941년 5월 15일 홍색 근거지 옌안(延安)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국민을 분리하려 했다. 발족을 앞둔 해방일보(解放日報)와 신화사(新華社)에 중앙서기처 명의로 보낼 문건의 초안을 직접 작성했다. 이 여인은 어디서 봤는지 이 문건 내용까지 인용했다. “마오 주석은 중국 인민과 일본 인민은 오직 하나의 적(敵)만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말을 했다. 일본 인민의 적은 일본 제국주의, 중국 인민의 적은 중국민족의 변절자라고 단언했다. 백골이 된 이 사람들은 제국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현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성(省) 정부에 여인의 편지를 보냈다. 성 정부도 끙끙댔다. 묵살하자니 불안했다. 더 높은 곳에 보고하고 처분 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베이징의 국무원에 서신을 발송했다.

1939년 5월 2일, 만주국수도 창춘(長春)에서 열린 전국 국민총동원대회. 멀리 만주국 국기와 일장기가 보인다. [사진 김명호]

1939년 5월 2일, 만주국수도 창춘(長春)에서 열린 전국 국민총동원대회. 멀리 만주국 국기와 일장기가 보인다. [사진 김명호]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결정이 빨랐다. 성 인민위원회에 1만위안을 보내며 지시했다. “일본개척단 난민의 유골 5000여구를 수습해서 ‘팡정지구 일본인 묘지’를 건립해라.” 성 정부는 인적 뜸한 곳에 엉성한 공묘(公墓)를 만들었다. 1975년 중·일 수교 3년 후, 공묘를 멀쩡한 곳으로 이전했다. 다시 9년이 흘렀다. 1984년 9월 18일 헤이룽장성 영사처가 일본 측과 합의했다. “인근 마산(麻山)지구에서 집단자살한 개척단 난민의 유골을 팡정의 일본인 공묘로 이송한다.” 일본 측의 요구는 계속됐다. 2년 후 일본우호방문단이 다른 지역에 흩어진 개척단 난민 유골의 팡정 이전을 제안했다. 중국 측은 거절하지 않았다.

일 고아, 양부모 누구냐에 따라 삶 달라져

용케 살아남아 쫓겨나다시피 만주(동북)를 떠나는 일본인들. [사진 김명호]

용케 살아남아 쫓겨나다시피 만주(동북)를 떠나는 일본인들. [사진 김명호]

팡정현은 얼떨결에 북만주 일대에서 객사한 개척단 난민 유골의 집결지가 됐다. 팡정현 현지(縣志)에 의하면 당시 중국 가정에서 키운 일본 고아는 4000명을 웃돌았다. 4000명 고아의 배후에는 4000개의 중국 가정이 있다는 의미였다. 평생 팡정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는 노인의 구술을 소개한다. “팡정에 떨궈진 일본 고아들은 양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훗날 중국에 대한 호불호가 달랐다. 팡정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류창허(劉長河·유장하)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류창허의 본명을 아는 팡정인은 없다. 1940년 두 살 때, 3대가 팡정현에 와서 개척단에 가입했다. 1년 후 부친이 군에 징집됐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가족 8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가을비가 요란한 날 밤, 진흙 구덩이에서 헤맬 때 저공 비행하는 소련 비행기가 불을 뿜었다. 모친은 시부모 앞에서 갓 태어난 막내아들의 목을 살며시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집단자살한 시신의 악취와 빗물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조부모와 출산을 앞둔 고모는 노변에서 사망했다. 모친 등에 있던 3살 된 여동생도 보이지 않았다. 2개월 만에 창허와 시동생 데리고 팡정 난민수용소에 도착한 모친은 일주일 후 긴 한숨 내쉬며 눈을 감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목수 부부가 난민촌을 찾았다. 다리가 마비된 창허를 솜이불에 싸서 집으로 안고 갔다. 부부는 해만 뜨면 창허를 업고 병원으로 갔다. 해가 지면 다리 문지르며 밤을 지새웠다. 온몸에 피가 돌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창허는 좋은 교육도 받았다. 헤이룽장대학 러시아어학과를 마친 후 하얼빈19중학교 교사로 임용됐다. 양부모도 극진히 섬겼다. 1974년 중·일 수교 2년 후, 처자와 함께 일본에 정착했다. 회사설립 후에는 노년의 양부모를 일본으로 모셨다. 양부모는 이국 생활이 불편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창허는 매년 팡정을 찾았다. 1개월씩 머무르며 양부모를 봉양했다. 팡정현 정부와 모교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양부와 양모의 임종은 물론 염(殮)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런민비(人民幣) 13만위안 들여 안식처를 조성했다. 영세불망양육지은(永世不忘養育之恩)이라는 비문도 직접 썼다. 2011년 팡정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전 중국이 진동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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