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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사단’ 룸메이트 김일과 혈전, 알리와 세기의 대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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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26면

[죽은 철인의 사회]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

1974년 10월 도쿄에서 맞대결을 펼친 안토니오 이노키와 김일. [중앙포토]

1974년 10월 도쿄에서 맞대결을 펼친 안토니오 이노키와 김일. [중앙포토]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대부 안토니오 이노키(본명 이노키 간지·猪木寬至)가 1일 오전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79세.’

중앙일보 10월 3일자에 이영희 도쿄특파원이 쓴 부음 기사를 보면서 나는 2018년 6월 11일 이노키 의원과의 인터뷰 장면을 떠올렸다. 그날은 도쿄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참의원 의원회관 314호실. 안토니오 이노키 의원은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 접견실로 들어왔다. 몸은 불편해 보였지만 트레이드 마크인 빨강색 롱 스카프를 멘 모습은 여전히 의욕적이었다. 건강이 어떤지 묻자 그는 “목부터 다리까지 전부 수술을 받은 터라 성할 리가 있나요. 특히 허리와 다리가 불편합니다. 건강이 정말로 중요한 거예요”라며 웃었다.

죽을 만큼 힘든 훈련 버티며 기량 쌓아

역도산 문하생 선수들이 김일의 경기 이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이 자이언트 바바, 오른쪽이 안토니오 이노키. [중앙포토]

역도산 문하생 선수들이 김일의 경기 이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이 자이언트 바바, 오른쪽이 안토니오 이노키. [중앙포토]

190㎝ 거구, 상남자 스타일에 화려한 기술을 겸비한 이노키는 김일(1929~2006), 자이안트 바바(1938~1999)와 함께 ‘역도산(力道山·일본 발음 리키도잔) 사단’의 삼총사였다. 이노키는 역도산이 스카우트 해 키웠고, 이노키 또한 역도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셨다. 은퇴 후 스포츠평화당을 창당해 참의원이 된 뒤에는 북한과의 스포츠 교류에 힘썼다.

이노키는 역도산 문하에서 김일과 한 방을 썼고, 휴가 때는 김일의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사각의 링 위에서는 처절한 혈투를 펼쳤다. 김일의 박치기를 맞아 유혈이 낭자한 중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김일의 말년엔 매년 병상을 찾아 병원비를 전달할 정도로 우의가 두터웠다.

요코하마 출신 이노키는 중학생 때 브라질로 건너가 커피 농장 등에서 일했고, 포환던지기 선수로 뛰기도 했다. 이노키는 역도산과의 운명적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역도산 선생은 두 번 브라질에 오셨다. 스승은 일본인(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곳을 순회하셨는데, 내가 살던 곳은 오지(奧地)여서 뵐 수가 없었다. 농장 일이 너무 힘들어 상파울루로 옮겨 생화(生花) 시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두 번째 방문하셨다. 역도산초청위원회 위원장이 내가 전년도에 포환던지기 우승을 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선생에게 소개해 주셨다.”

“옷을 벗어보라”는 역도산의 주문에 셔츠를 벗고 앞뒤로 돌아 보였는데, 곧바로 합격이었다. 그 길로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노키 의원이 준 명함에 있는 무하마드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 장면. [중앙포토]

이노키 의원이 준 명함에 있는 무하마드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 장면. [중앙포토]

역도산의 훈련은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훈련하다 맞아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노키는 “매우 힘든 훈련을 받았다. 주로 기초체력 훈련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브릿지(몸을 뒤로 젖혀 복근의 힘으로 아치 모양을 만드는 것) 같은 거다. 실전 기술은 외국 선수들로부터 많이 배웠다”고 했다.

역도산은 자신이 한국인(김신락)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1963년 겨울,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와 시비 끝에 칼을 맞은 역도산은 상처가 깊지 않아 수술은 잘 끝났으나 복막염으로 2차 수술 후 숨을 거둔다.

2018년 인터뷰에서 ‘스승의 죽음에 대해 많은 의혹과 음모론이 있다’고 하자 이노키 의원은 “칼을 맞은 다음날 입원한 병원이 산부인과여서 외과적인 조치가 미흡했다. 또 수술 뒤 가스가 대장을 지나 몸 밖으로 배출돼야 하는데 그 전에 녹차인지 주스인지를 마신 게 결정적인 사인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누군가 마시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회고했다.

이노키가 일본에 와서 생활한 도장 건물에는 극장도 있었다. 한 사내가 다가와 함께 극장에 가자면서 “난 한국인, 넌 브라질인. 친하게 지내보자”고 했다. 김일이었다.

이노키는 “역도산 문하생 중 김일 선수가 가장 연장자였는데 나를 많이 챙겨줬다. 같은 방을 써 더 친해졌다. 자이안트 바바는 야구 선수(요미우리 자이언츠) 출신이라 처음엔 실력이 형편없었는데 점차 기술이 좋아졌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프로레슬링 데뷔전에서 김일을 만난 이노키는 팔꺾기에 걸려 7분 5초 만에 패했다.

이후 이노키와 김일은 일본과 한국에서 수많은 경기를 치렀다. 머리가 깨져 선혈이 낭자한 격전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격하했다. 이에 대해 이노키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2014년 8월 국제 레슬링대회 유치를 위해 평양에 간 이노키 의원 일행. [중앙포토]

2014년 8월 국제 레슬링대회 유치를 위해 평양에 간 이노키 의원 일행. [중앙포토]

“시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 선수를 다치지 않게 하는 거다. 우리에게는 ‘리키도잔이즘(역도산 정신)’이라는 것이 있었다. 상대가 이 정도로 승부를 걸어오면 우리도 그 정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다. 즉 상대가 걸어오는 기술에 따라 우리의 기술도 맞춰 나가는 것이다. 당시에도 짜고 하는 쇼 같은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리키도잔이즘을 가지고 있던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노키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계기는 1976년 열린 프로복싱 헤비급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이었다. 당시 파이트머니가 18억엔(약 180억원)에 달했고 14억 명이 TV로 경기를 지켜봤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세기의 졸전’이었다. 3분 15회전 내내 이노키는 누워서 알리의 다리를 향해 킥을 시도했고, 알리는 이노키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무승부로 경기가 끝난 뒤 알리가 “누워서 돈 버는 건 창녀와 이노키 밖에 없을 것”이라고 도발하자 이노키는 “넌 누워 있는 창녀를 상대로 아무 것도 못하는 고자냐?”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경기 규칙이 문제였다. 이노키는 로프 터치, 그래플링(상대를 잡고 던지는 것)이 금지됐고, 일어선 상태에서 허리 위 타격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알리 측에서 ‘우리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돌아간다’고 으름장을 놓아서 그 쪽 조건을 모두 들어주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치기왕’ 김일 말년엔 병원비 전달도

2006년 2월 도쿄의 음식점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만난 김일 선생과 이노키. [중앙포토]

2006년 2월 도쿄의 음식점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만난 김일 선생과 이노키. [중앙포토]

그럼에도 알리는 경기 후 혈전 수술을 받아 한 달간 입원했고, 오른발 킥을 날렸던 이노키는 박리골절상을 당했다. 이노키는 “당시 평가는 처참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경기가 격투기의 원조라 평가받고 있지 않나”라고 했다.

이노키는 참의원 시절을 포함해 북한을 33차례나 방문했다. 방북 동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스승 역도산의 고향(함경남도 홍원군)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방북하면서 북한에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노키 의원은 “남북한이든 일본-북한 관계든 사람의 교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내 신념이다. 스포츠 교류를 통한 세계 평화! 이것이 내 일이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난 북한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적인 만남이 아니라 술잔을 기울이면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듯 그들의 표현이 거친 부분은 있었지만 대화에 대한 갈망은 늘 있어 왔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도 남북 스포츠 교류를 위해 힘썼고, 금강산에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종합격투기 대회를 열자는 제안도 했다.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도 그가 주도해 만든 이벤트다. 당시 한국외대생 임수경이 참가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프로레슬러로, 정치인으로, 엔터테이너로 호방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떠나기 5년 전인 2017년 10월, 자신이 개최한 종합격투기 대회장에서 미리 ‘이별 파티(生前葬)’를 했다.

‘투혼 싸대기’ 체험 여기자 “머릿속 하얗게 변해 번지점프 한 느낌”

2011년 7월 박소영 중앙일보 특파원이 이노키의 '투혼 싸대기'를 맞고 있다. [중앙포토]

2011년 7월 박소영 중앙일보 특파원이 이노키의 '투혼 싸대기'를 맞고 있다. [중앙포토]

안토니오 이노키는 엔터테이너로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히트상품은 ‘투혼 싸대기’였다. 이노키에게 뺨을 맞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그럴싸한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선거를 앞둔 정치인, 인기 연예인,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 등이 줄을 서서 싸대기를 맞았다.

2011년 7월, 이노키 의원을 인터뷰 한 박소영 중앙일보 도쿄특파원도 ‘싸대기 체험’에 나섰다. 가녀린 몸매의 박 특파원은 “조금만 살살 때려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라며 사정을 했다. 체험기 기사를 소개한다.

“소원 한 가지를 생각해 두세요. ‘투혼 싸대기’는 남녀노소 사람에 따라 강도를 달리하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신경을 머리에 모으시고… 얍!” 그의 기합소리와 함께 솥뚜껑만 한 그의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지만 번지점프를 하고 난 느낌이랄까. 묘한 달성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는 분명 프로였다. 요란한 소리에 비해 강도는 약했다. 뺨에 손자국도 남지 않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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