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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10년 증명 시험대…첫 공연 부담감 숨막혀, 내 인생 단두대라 생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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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호 23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엘리자벳’ 주연 이지혜

뮤지컬 ‘엘리자벳’ 10주년 공연에 주인공 엘리자벳으로 출연 중인 배우 이지혜. 개막 전 시끄러웠던 캐스팅 논란을 딛고 탄탄한 실력을 무대에서 증명해냈다. 김경빈 기자,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엘리자벳’ 10주년 공연에 주인공 엘리자벳으로 출연 중인 배우 이지혜. 개막 전 시끄러웠던 캐스팅 논란을 딛고 탄탄한 실력을 무대에서 증명해냈다. 김경빈 기자,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배우 이지혜는 올해 업계에서 가장 핫한 배우가 됐다. 캐스팅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대작 ‘엘리자벳’ 10주년 공연에 대선배들을 제치고 발탁됐기 때문이다. ‘옥주현이 미는 배우’로 알려지며 논란의 단초가 된 게 억울할 법도 하다. 2012년 ‘지킬앤하이드’의 엠마로 데뷔한 이래, ‘베르테르’의 롯데, ‘팬텀’의 크리스틴, ‘몬테크리스토’의 메르세데스 등 대극장 뮤지컬의 여주인공으로 검증받아온 ‘블루칩’ 배우라서다. 하지만 그에게 ‘엘리자벳’은 경력 10년차에 새삼스럽게 온힘을 다해 증명해 내야 하는 시험대가 됐다.

어릴적 조수미 노래 듣고 성악가 꿈 꿔

“첫공을 생각하면 잠깐 울고 가야 돼요. 내 인생의 단두대다 싶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증명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숨막히게 짓눌러왔죠. 달력의 첫공 날짜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공포였어요. 연출부가 멘탈 케어를 해줬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저에게 연습의 힘을 믿으라고, 증명하려 하지 말고 즐기라고 말해 줬으니까요. 초반에 기절하는 장면이 있는데, 혹시 실제로 기절해서 못 일어나면 막을 내려달라고 부탁해놨어요. 그대로 은퇴하려고요.(웃음) 다행히 일어났지만요.”

첫공부터 시그니처 넘버인 ‘나는 나만의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증명’에 성공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장면에서 “10년 경력에 가장 아찔했던 공포의 순간”을 맛봤단다. “결혼식 장면이 끝나자마자 30초 안에 웨딩드레스를 벗고 퀵체인지를 해야 되거든요. 근데 벗는 순서가 꼬여서 소매가 절대 안 벗겨지는 거예요. 소매에 웨딩드레스를 매단 채로 ‘나는 나만의 것’을 부를 생각을 하니 끔찍했죠. 짧은 순간에 온갖 신을 다 부르며 기도했네요.(웃음) 다행히 마지막 순간 옷을 찢고 퀵체인지에 성공했죠. 개막 전엔 워낙 대곡이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을 겪고 나니 감정적으로 완벽한 시너지 효과가 났어요. ‘난 싫어, 이런 삶’이란 가사가 절로 나오더라구요.(웃음)”

그가 ‘엘리자벳’을 처음 만난 건 신인 시절인 2015년이었다. 관객으로서 “뮤지컬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고. “프롤로그부터 압도당했죠. 기괴한 음악 속에 무덤에서 일어난 인물들이 좀비춤을 추며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하잖아요. ‘엘리자벳이 황실에 죽음을 데려왔다’는 민담과, 엘리자벳이 죽음을 대상화해서 직접 쓴 시에서 모티브를 얻어 죽음을 의인화시킨 것도 매혹적이고요. 관객 입장에서 너무도 사랑했던 작품에 주인공으로 선다는 게 꿈같은 일이지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부담감도 있었어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여자로서 황후 엘리자벳의 심연을 어떻게 헤아릴까.’ 연습 초반 그의 고민이었단다. 하지만 엘리자벳의 낭떠러지는 자신에게도 찾을 수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부르는 ‘아무것도’라는 넘버가 그녀의 인생을 짧게 요약할 수 있는 한 페이지거든요. 나에게는 그만한 삶의 깊이가 없는 것 같아서 더블캐스팅인 주현 언니에게 물어봤어요. 언니가 연습실에서 자신이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삶의 끝자락까지 갔었던 인생경험을 투영하며 그 장면을 설명해주는데, 그걸 들으며 울었어요. 결국 이건 한 인간의 서사구나.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나를 투영해도 되는구나를 깨달았죠. 실제로 이번 작품 준비하면서 꽤 힘든 일도 있었잖아요. 내 아픔을 들춰낼 때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건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그걸 통해 치유받기도 하더라구요. 그런 게 자양분이 돼서 무대에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이 직업의 매력인 것 같아요.”

사실 2012년 ‘엘리자벳’ 국내 초연부터 다섯 시즌 내내 출연한 대표 배우가 옥주현이다. 체격이 크고 비주얼부터 카리스마를 풍기는 옥주현에 비해 한참 소녀같은 이미지의 이지혜는 차별화를 시도했을 법도 하다. “차별화라기보다는 관객으로서 정말 사랑했던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목표였어요. 엘리자벳이 갈망했던 순수함과 평범함이 저에게는 있으니, 그녀가 갈망했던 해방감과 자유라는 결핍을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었죠. 그 결핍이 그녀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했지만,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죽음과 맞서 싸우며 살아내려는 의지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야 마지막에 죽음으로 자유를 얻었을 때 관객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도 그 해답을 찾는 여정에 있어요.”

아담한 체구에 놀랄 만큼 파워풀한 가창력을 가진 그는 어린 시절 조수미의 노래를 처음 듣자마자 “꿈이 조수미”가 됐을 정도로 프리마돈나가 되고픈 성악도였다. 중앙대 성악과를 수석졸업하고 뮤지컬 배우가 된 건 교회의 선교 뮤지컬에 출연하면서다. “그때 노래하면서 연기한다는 것이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구나 깨달았는데, 동료 언니가 ‘지킬앤하이드’ 오디션을 같이 보러 가자고 데려가 줬어요. 당시 신인이 엠마에 캐스팅된 것이 업계에서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죠.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선 것도 너무나 거짓말 같았고요. 그 전 해에 같은 장소에서 푸치니 오페라에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 배우들이 왔을 때, 저는 객원 합창단으로 서서 ‘나도 언젠가 이런 무대에 주인공으로 서는 순간이 올까’ 꿈꿨었거든요. 정확히 1년 뒤 꿈이 이뤄졌죠.”

데뷔 직후 두 번째 작품 ‘베르테르’에서 만난 롯데는 그의 인생 캐릭터가 됐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여인의 감정선을 이해할 수 없어 호된 성장통을 겪었지만,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감사한 작품”이란다. “너무 힘들어서 조광화 연출님께 왜 저를 캐스팅했냐고 울면서 물었어요. 20대 초반에 다이나믹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롯데를 이해할 수 없었죠. 온실 속 화초 같아서 가장 마음이 아픈 캐릭터인데, 표현 방법을 몰라서 하루종일 연출님 노트를 받았거든요. 그럼에도 연출님이 제 모든 공연을 빠짐없이 모니터해주시고 격려해주시면서 롯데로 받아들여주셨어요. 그때 더블캐스팅인 전미도 언니를 보며 내가 30대 초반이 되면 저런 깊은 연기가 나올까 싶었는데, 지난 시즌에 정말 30대 초반에 캐스팅이 됐거든요. 이번엔 연출님이 노트에 ‘지혜 롯데, 살아 있다’는 딱 한마디를 써 주셨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옥주현, 롤모델이자 선생님·엄마 같아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파친코’에 성악가 역으로 출연하고,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정통 성악가들이 한곡의 아리아를 온전히 부르는 프리마돈나 패티 역까지 욕심낸 것은 성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올 초 가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첫 음원을 내기도 했다. “저의 기반이 되어준 게 클래식이니까요. 뮤지컬과 부딪치는 부분도 있지만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거라 생각하고, 제 뿌리인 클래식을 놓고 싶지 않아요. 제 영혼의 안식처거든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작년 ‘불후의 명곡’에서 불렀던 곡인데,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무렵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음원을 냈어요. 방송 출연 당시에도 희망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싶어서 편곡을 하고 애드립도 짜서 구성한 곡이거든요. 주현언니 집에서 며칠동안 합숙하듯 준비했었죠. 그때 입었던 노란색 녹두꽃 의상은 언니가 만들어준 거예요. 언니는 손바느질로 옷을 만들고, 저는 애드립을 구상하면서 밤을 샜던 게 많은 공부가 됐어요.”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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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이일까 궁금해지는 에피소드다. 캐스팅 소동에 대해선 함구했지만, 옥주현과의 관계에 대해선 살짝 눈물을 비치며 “나의 롤모델”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스위니토드’에서 처음 만났을 땐 “무섭다. 인사나 잘하고 거슬리지 말자” 싶었단다. “저도 처음엔 ‘왜 옥주현 마이크만 소리가 크지. 옥주현이라고 키워달라고 하나’ 오해했어요. 근데 그게 옥주현의 전달력이더군요. 언니는 한국에서 여배우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후배를 키우고 싶다고 하세요. ‘넌 네 안의 능력을 모른다’면서 근본적인 발성부터 건강하게 노래하는 법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대가 없이 쏟아주는 선생님이자 언니이자 엄마 같은 존재죠. 저도 언젠가 연륜이 쌓이면 그런 선배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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