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립극단 ‘세인트 조앤’, 잔다르크 이야기에 우리 모습 투영

중앙선데이

입력

‘김광보 연출’이 3년 만에 돌아왔다. 셰익스피어부터 대학로 2인극, 뮤지컬과 오페라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재미와 의미를 겸비한 무대를 숱하게 만들어온 그가 ‘숨겨진 카드’를 꺼냈다. 2020년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연출은 당분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던 터라 더 이목을 끈다. “첫 리딩 때 숨어있던 연출가의 느낌이 닭살 돋듯 살아나는 걸 느꼈다. 역시 난 연출가구나 싶었다”는 그의 복귀작 ‘세인트 조앤’은 오랜 기다림을 배신하지 않는다.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사실 처음엔 갸우뚱했다. 세월호 사태를 초래한 적폐를 꼬집었던 ‘살아있는 이중생각하’‘사회의 기둥들’(2014), 장미대선과 절묘히 맞아떨어졌던 ‘왕위주장자들’(2017) 같은 굵직한 작품을 할 땐 늘 우리 사회의 거울같은 무대를 만들어 왔던 김광보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서의 첫 작품으로 왜 버나드 쇼가 그린 중세 프랑스의 잔다르크 이야기를 택했을까. 15세기 백년전쟁 서사에서 “동시대성에 매력을 느꼈다”면서도 “영웅이나 성인을 강조한 게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에 치중하는 작품이다. 잔다르크가 가진 신념이 어떻게 무너지고 좌절되는가 생각해보게 하는 연극”이라는 그의 설명도 아리송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키워드는 ‘배신’이다.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프랑스왕 샤를 7세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갑자기 나타난 열다섯살 소녀 조앤을 전쟁에 중용하지만, 승리의 군주로 우뚝 서자 곧바로 조앤을 버린다. 전쟁 영웅 조앤은 타락한 정치와 종교의 복잡한 이해 관계 속에서 마녀사냥을 당하는데, 그녀를 화형시킨 지 25년만에 복권시키는 것도 같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다. 조앤을 둘러싼 재판 과정의 지루한 말싸움과 궤변들이 왠지 낯설지 않다.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김광보의 페르소나’였던 이승주 배우가 5년 공백을 깨고 복귀해 찌질하고 이기적인 왕의 배신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이 무대의 유일한 여성이자 타이틀 롤을 맡은 백은혜 배우도 안정된 연기를 보여 주지만, 대주교, 종교재판관, 워릭 백작 등 조연들의 존재감이 새삼스럽다. 주인공 한두명의 행위가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입씨름의 결과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압권은 샤를 7세의 꿈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소환하는 에필로그의 연출이다. “이 작품에 악인은 없다. 각자 주어진 직분을 다할 뿐”이라고 했던 버나드 쇼의 말대로, 조앤을 영웅에서 마녀로, 또다시 성인으로 몰아가며 오락가락했던 사람들이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변명의 향연을 펼친다. 역사의 영웅도, 마녀도, 성인도, 그저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라는 고해성사다.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연극 '세인트 조앤' [사진 국립극단]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