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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이 사라졌다, '사장'이자 '가장'의 새로운 가족 드라마[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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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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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이야기장수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그는 빠르게 속기로 한다.'

총명한 어린 손녀는 대가족의 가장인 할아버지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가부장제를 흡수했다. 그런데 자라서는 혼자 집을 사고, 회사를 차려 엄마·아빠를 고용하고, 가부장도 가모장도 없는 '가녀장의 시대'를 연다. 자칭 '글쓰기 노동자' 이슬아 작가의 첫 장편이다. 주인공 이름도 이슬아. 작가의 삶에 픽션을 섞어 완성한 듯한 소설이다.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때려 부술 것 같은 제목과 달리, 소설에서 가부장제를 대신하는 건 '가녀장제'가 아니라 평등이다. 군림하는 가녀장은 없다. 지휘하는 '가장'이자 '사장' 슬아만 존재한다. 슬아는 청소, 밥하기, 운전, 음식물 쓰레기통 세척 등 일상의 수고로운 노동에 모두 비용을 지불한다.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지급하지만 어떤 것들은 돈 주고도 사기 힘든 노동이다'라는 지론인데, 비용을 지불하고 사는 노동도 존중을 잊지 않는다. 일할 때는가족 간에도 서로 존대한다.

슬아의 엄마와 아빠는 '복희' '웅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불린다. 복희는 살림과 돌봄 노동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부장제 아래서 11인분의 음식을 만들고 '여기저기 이름 없이 호명되며' 살았지만, 슬아는 그 재능을 돈으로 사서 누린다. 자동차 부품 상가, 목공소, 운전병 등 숱한 직업을 거친 웅이는 딸의 출판사에서 청소와 운전과 책장 제작 등을 하며 월급을 받는다. 그에겐 가녀장의 시대가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라' 서로를 도울 수 있는 호시절이다.

평등한 새 체제에서 가족의 모습은 명랑만화처럼 펼쳐진다. '독주를 마시면서 얼렁뚱땅 시작되는 아침을 좋아한다'며 아침마다 위스키 탄 믹스커피를 마시는 복희, '내가 청소를 좀 잘해서' 라며 팔에 청소기와 대걸레를 타투로 새긴 웅이는 합리적인 고용주인 딸을 보며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라며 함께 킬킬댄다.

1992년생 작가가 구독자에게 이메일로 글을 보내는 '일간 이슬아'에 연재한 소설을 책으로 묶었다. 부모 대신 모부, 아들딸 대신 딸아들 등 작은 단어의 변화로도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힘'을 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 없이 쿨하게 말로 비틀며 물음표를 던지는 Z세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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